신경림 1935∼2024 대학 2학년 때 ‘낮달’로 등단… 문단 행태에 실망 10년간 절필 고향서 농사 짓고 노동자의 삶…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등 남겨 “한국인의 정서, 쉬운 언어로 표현”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출간 25주년을 맞아 2013년 1월 동아일보와 만난 고인.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중략)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의 원로 시인 신경림(본명 신응식)이 2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평생 빈자와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했던 고인의 장례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 “내 가슴속 뭔가를 얘기하고 싶었다”
문단에 이름을 알린 건 1956년 동국대 영문과 2학년 때 시 ‘낮달’ 등을 문학예술지에 실으면서다. 그러나 당시 문단의 행태에 실망해 약 10년간 절필하고 귀향해 농사, 광산 일, 공사장 노동 등에 종사했다. 이는 그가 농민의 삶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민중 시인’으로 서는 밑거름이 됐다.
고인의 대표작 ‘농무’에는 산업화로 황폐해진 농촌의 쓸쓸한 분위기가 담겼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는 버려두고 신명 나게 춤추는 이들의 공허한 심정을 그려냈다. 유자효 전 한국시인협회장은 “고인은 한국인의 정서를 시로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었다. 쉬운 생활어로 깊은 내용을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10년간 시골에 박혀 살면서 ‘사람은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고인은 사회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1975년 평론가 백낙청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세운 데 이어 1980년 7월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 한국 사회 ‘인정’과 ‘소통’ 필요하다
대표작 ‘가난한 사랑노래’에도 엄혹한 시대의 아픔을 담아냈다. 고인은 201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랑노래’에 ‘기계 굴러가는 소리’라는 대목은 원래 ‘탱크 굴러가는 소리’였다”며 “(시대 상황을 고려해) 출판사에서 수정하는 게 좋다고 해서 고쳤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더욱 양극화되고 배타적으로 변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2015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은 안 바뀌면서 다른 사람만 바꾸려고 한다. 세상의 변화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인정할 건 인정하는 동시에 그 사람이 지적하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성찰하는 데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며 ‘인정’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한 일은 시 몇 편을 쓴 것일 뿐”이라며 “제 시가 세상의 쓰레기 하나 더하는 시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대장암 7년 투병에도… 말년까지 창작 의지
동료들 “소탈하고 편안한 사람”
“장례는 간소하게” 유언 남겨
“장례는 간소하게” 유언 남겨
22일 별세한 신경림 시인은 말년까지 창작 의지를 보였지만 대장암이 심해지면서 긴 투병 생활을 주로 이어갔다. 2017년부터 대장암 치료를 받았고 최근 병색이 급격히 악화됐다고 한다.
고인이 마지막 치료를 받았던 국립암센터의 서홍관 원장은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고 매일 5000보씩 걸을 정도로 정정하셨는데 한 달 전쯤 폐 부위에 암이 재발하면서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말했다. 이달 초 고인을 면회한 안종관 극작가는 “자꾸 잠이 들어 말씀은 못 하셨지만 건강하실 때 늘 빙긋 웃고 계시던 얼굴 그대로였다”고 전했다. 고인은 병세가 위중해진 최근에 “장례는 격식을 차리지 말고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평소 고인과 교류해 온 문단 동료나 후배들은 소탈하고 편안한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다. 곽효환 시인(한국문학번역원장)은 “문단의 다른 어른들한테는 꺼내기 힘든 불만이나 고충을 선생님께는 곧잘 털어놓을 수 있었다”며 “속 깊고 후배들을 잘 챙겨 주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인의 충주고 1년 선배인 유종호 전 연세대 교수(문학평론가)는 “당시 국어 교사셨던 부친이 고인의 문학적 재능을 칭찬하시면서 문예지에 그의 작품이 실리도록 해준 게 기억난다”면서 “(고인은) 아주 소탈하고 어깨에 힘을 안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