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고금리에 빚 못갚는 서민 급증
신용카드 이용자들이 1개월 이상 갚지 못한 연체액이 2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카드 가입 문턱을 크게 낮춰 2002년부터 2006년 사이 수백만 명의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를 양산했던 ‘카드 대란 사태’ 당시와 맞먹는 규모다. 고물가, 고금리 장기화와 경기 부진이 이어지면서 카드값을 갚지 못하는 서민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22일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신한, 삼성, 현대, KB국민, 롯데, 우리, 하나, 비씨 등 전업 카드사 8곳의 1개월 이상 신용카드 연체 총액(지난해 말 기준)은 2조924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한 수준이다.
지난해 말 카드 연체액은 금감원이 해당 통계를 추산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세 번째로 많은 규모다. 카드 대란 사태가 한창이었던 2003년(4조4227억 원), 2004년(2조5413억 원)과 비슷한 규모의 연체가 경기 불황과 고금리 충격파 속에 발생한 것이다.
카드 연체율 9년만에 최고… 나라가 갚아준 서민빚도 2.3배로
작년말 신용카드 연체 위험수위
고금리에 악성채권 50% 증가… 카드업체 수익-건전성 빨간불
13개 보증 공공기관 대위변제액… 작년 13조4412억, 1년새 130%↑
경기 평택시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 씨(44)는 석 달째 카드 대금을 납부하지 못하고 있다. 카페 인근에 있던 중소기업이 본사를 타 지역으로 옮기면서 단골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김 씨는 “다른 카드사의 단기대출(카드론)로 돌려막기도 해봤지만 금리 부담이 커서 그마저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개인회생을 신청해야 할 것 같아 관련 내용들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고금리에 악성채권 50% 증가… 카드업체 수익-건전성 빨간불
13개 보증 공공기관 대위변제액… 작년 13조4412억, 1년새 130%↑
최근 ‘카드대란 사태’ 때와 맞먹는 수준까지 불어난 신용카드 연체액이 금융 시장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익성과 건전성에 빨간불이 켜진 카드업계는 사실상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
카드 대금을 장기간 갚지 못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6개월 이상 연체된 악성 채권은 1879억 원으로 1년 전(1243억 원)보다 636억 원 증가했다.
이렇다 보니 최근 카드사들은 연체율을 낮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카드업계 고위 관계자는 “카드 연체 규모가 2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는데, 이는 가계의 상환 여력이 그만큼 악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업계 전반적으로 이렇게 연체율 관리에 예민한 것은 카드대란 사태 이후 처음”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내 카드업계의 재무 건전성은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우려하는 수준까지 악화됐다. 무디스는 20일(현지 시간) KB국민카드의 장기 신용등급(A2)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향후 재무 상태가 개선되지 않으면 신용등급을 낮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무디스는 보고서를 통해 “개인 채무재조정 건수(카드론 대환대출 포함)의 증가로 다른 동종 업체 대비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며 “고금리 환경이 지속될 경우 추가 건전성 악화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보증기관이 대신 갚은 빚만 13조 원
대위변제란 대출자가 원금을 상환하지 못했을 때 정책기관이 은행 대신 빚을 상환해주는 것을 말한다. 대위변제액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연평균 5조8000억 원 수준을 유지하다가 지난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지역신용보증재단의 대위변제액이 2022년 5076억 원에서 1조7126억 원으로 237.4% 증가했다.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의 경제 상황 악화로 대출을 갚지 못한 사례가 속출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위변제를 해주는 기금의 재원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대부업이나 제2금융을 다시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우석 기자 ws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