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 기로에 선 이원석 검찰총장
이원석 검찰총장이 14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뉴스1
“외롭습니다.”
11일 이 총장은 가깝게 지내던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과 인사 문제를 처음 협의하던 날이었다. 총장으로선 두어 번 직속 상관으로 모셨던 장관마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갑갑했을 것이다. 이틀 뒤 서울중앙지검 수사지휘 라인을 교체하는 인사가 단행됐다.
지방 출장 중이던 총장이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로 왔다. 다음 날 출근길엔 ‘7초 침묵’ 뒤 “인사는 인사, 수사는 수사”라고 했다. 그를 잘 아는 전직 검사는 “총장이 첫 반응을 어떻게 할지 조언을 구했다. 장관이 인사권을 행사하자 총장이 ‘수사는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대응한 것”이라고 전했다.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아야”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재임할 때 참모였던 이 총장은 정권 초엔 종종 대통령과도 직접 소통했다고 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처럼 그도 대통령과의 연락이 어느 순간 끊겼거나 혹은 스스로 접촉을 피했을 것이다. 검찰총수들은 늘 “힘들고, 외롭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 총장이 “저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이 총장은 한 달 전쯤 ‘그런 말을 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아야 군자라고 하지 않나.” 논어에 나오는 구절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지만 저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서운하고 섭섭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보는 분에 따라서”라고 했다.
“용산의 의사결정 체계 어떻게 보나”
그 즈음 이 총장은 “요즘 용산의 의사결정 체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말도 했다. “나는 대통령이 총장일 땐 2, 3번이 아니라 4, 5번 총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처음엔 ‘그게 된다는 말이냐’고 물어본다. 그러고 난 뒤에는 ‘그게 맞으면 자네들 뜻에 따라 하라’고 했다.” 이 총장이 대검 참모 시절 오전 보고 때 총장에게 심하게 깨지면, 오후에 다시 들어가서 결재를 받아왔다고 한다.
“세 가지 사건으로 균열 발생”
이 총장에 대한 윤 대통령의 신임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서초동에 처음 퍼진 건 지난해 9월 초순 검찰 인사 때였다. 당시 총장의 참모진이 물갈이 됐는데, 총장은 막판까지 교체 여부를 잘 몰랐다고 전해진다. 참모진이 자주 바뀌면 ‘총장 라인’을 만들기 어렵다. 검찰 고위 간부는 “이 총장이 신뢰를 잃은 계기”라며 3가지 사건을 거론했다. △양평 공흥지구 개발 의혹 사건 △이태원 참사 관련 사건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이다. 야당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보다 이런 사건들이 균열의 원인일까.
하나씩 뜯어 보면 여권이 껄끄러워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지난해 5월 경찰은 사문서 위조 혐의로 양평 공흥지구 개발 사업에 관여한 대통령의 처남을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석 달 뒤 경찰이 적용하지 않았던 공무집행 방해 혐의를 추가해 처남을 기소했다. “총장이 꼼꼼하게 지휘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 총장은 올해 1월 4일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를 직권으로 소집했다. 심의위는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김 청장을 기소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김 청장이 기소됐다. “일선 지검의 불기소 의견을 뒤집은 배경이 뭐냐”고 수군거리는 검찰 관계자가 많아졌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당시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이 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에 대한 대면조사 필요성을 대통령실에 전달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28일 김 여사에 대한 특검법 통과가 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소는커녕 소환조차 못한 사건”이라는 입장을 줄곧 유지해 온 여권에선 “총장이 자기 정치를 하는 것 같다”는 불쾌감을 대놓고 표출했다.
“‘나도 사표 쓰겠다’ 2월 인사 유보”
세 번째 사건은 인사 충돌 직전까지 갔다. ‘원포인트 인사’로 송 검사장을 고검장으로 승진시켜 수사에서 배제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2년 전 김 여사에 대한 서면조사만으로는 부족하고, 대면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송 검사장이 굽히지 않고 있었다.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인사는 “설 연휴 직후 인사검증을 마무리했고, 박 장관이 취임하면 인사를 하려고 했다. 이 총장이 ‘나도 사표를 쓰겠다’고 버텨 유보됐다”고 전했다.
올해 1월 21일 이른바 ‘1차 윤-한 충돌’에 이어 만약 이 총장이 검찰 인사에 반발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총선을 앞둔 여권에 커다란 악재였을 것이다. 한 전 위원장과 이 총장은 사법연수원 같은 반이었다. 이 총장은 송 검사장의 고교 선배다. 여권에선 한 전 장관이 여당의 비대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뒤, 이 총장과 송 검사장이 한 몸처럼 움직인 배경을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인사는 막았지만 “이 총장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평가가 여권에서 강해졌다.
“도이치 수사지휘권” 약속 못 지켜
이 총장은 한 전 위원장처럼 이른바 ‘윤석열 사단’으로 분류되는 검사는 아니었다. 윤 정부 출범 직후 총장 권한대행 역할을 했지만 석 달 동안 총장 후보로 지명되지 않았다. 권한대행이 일종의 충성도 테스트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 사이 검찰 원로들은 대통령에게 이 총장보다 선배 기수에서 총장이 나와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한 검찰 원로는 “이 총장이 전임보다 7기수 아래 아니냐”고 했다.
이 총장은 현재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한 지휘권이 박탈된 상태다. 2020년 10월 당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발동한 지휘권을 장관이 3번 바뀌고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총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제가 수사지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지만 그가 총장이 된 후에도 법무부는 수사지휘권을 넘기지 않았다. 총장이 수사지휘권을 무시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법조계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총장은 “지금 복원하면 전임 장관의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법원 판단을) 오불관언할 수 있나”
수사지휘권 미복원은 ‘이원석의 검찰’이 김 여사 수사를 빨리 매듭짓지 못하는 ‘오판’을 불렀다. 처음엔 “1심 결과를 먼저 봐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2월 1심 재판부가 김 여사의 계좌가 주가 조작에 이용됐다고 판단했다. 야당이 특검법을 발의했는데, 그때라도 수사를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항소심까지 보겠다”며 다시 미적댔다. 이 총장은 평소 “법리적 문제를 법원과 검찰이 배치해서 어긋나게 하면 되나. (법원의 판단을) 오불관언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검찰 선배들은 수사 지연에 대해 “이 총장의 가장 큰 실수”라고 비판했다. 야당에는 특검법 추진의 빌미를 줬고, “왜 사건을 질질 끌었냐”는 여권의 불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번 검찰 인사 직전 이 총장은 디올백 수사에 대해서만 전담수사팀 구성을 지시했을 뿐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총장은 일반적 수사지휘권이 있다. 수사팀이 도이치모터스 수사 결과를 갖고 오면 국민적 의혹 사건에 대해 제대로 결론 내라고 지시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총장은 임기가 4개월도 남지 않았고, 수사가 그 전에 끝날지 불투명하다.
“사직도 귀하게 써야 될 상황 있다”
서울중앙지검장 교체 이후 이 총장은 전직 총장 등에게 거취와 수사 방향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한 전직 총장은 “지금 사표를 내면 정치권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표 내는 건 용기 있는 모습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다른 인사는 “외압은 항상 있다. 바르고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얼마 전 주변에 “사직도 다 때가 있고, 귀하게 써야 될 상황이 있다. 검사 생활 하면서 느낀 게 검찰은 권한은 있는 곳이 아니고, 의무밖에 없는 곳이다. 나갈 때까지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공직자는 임기를 지키는 게 중요하지 않다. 하루를 해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은 기간에도 그럴 것”이라는 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이 총장은 신임 검사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마태복음 한 구절을 소개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세상을 짜게 하리오.’ 그러면서 “첫 문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두 번째 문장”이라고 했다. ‘(짠맛을 잃은)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이다.’ 벼랑 끝에 좁게 들어선 ‘잔도(棧道)’를 걷고 있는 이원석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