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국에 살면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가보고는 가볼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먼 곳에 섬이 있더군요.”
11일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열린 한-프랑스 문화 교류 한마당 ‘2024 샴막 예술축제’ 사회를 맡은 프랑스인 이다 도시 숙명여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가 이 섬에 처음 와본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신안군은 유인도 73개와 무인도 952개 등 1025개 섬으로 이뤄져 있어 ‘천사(1004)섬’의 고장으로 불린다. 바다에 흩어진 섬들은 하나하나가 천사의 선물이고, 때로는 국제 교류의 현장이기도 했다. 과거 수많은 배들이 표류하다 닿았던 비금도에서는 한국과 프랑스 문화 교류를 기념하는 축제도 열렸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의 명소인 하누넘(하트 해변). 선왕산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하트 모양의 해변이 나온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인증샷을 남기고 속삭이는 해변이다. 비금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비금도 가산항 뒤편으로 보이는 설악산 암봉처럼 웅장한 그림산.
전남 목포 KTX역에서 차를 타고 1시간여. 현수교와 사장교로 이뤄진 천사대교를 건너 암태도 남강선착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페리호를 타고 50분 만에 비금도 가산항에 내리니 커다란 새 동상이 여행객을 반긴다. 비금도(飛禽島)는 하늘에서 보면 날개를 활짝 펼친 큰 새처럼 생겼기 때문에 섬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세운 것이다.
비금도 가산항에 세워진 날아가는 새의 조형물.
드넓은 염전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소금과 섬초(시금치)가 특산물인 비금도에서는 요즘 한창 익어가는 청보리가 바람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비금도는 섬 전체가 거의 평지인데 남서쪽에 설악산 암봉 몇 개를 떼어놓은 듯한 그림산(226m)과 선왕산(255m)이 우뚝 솟았다.
비금도 청보리밭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비금도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은데, 그중 사진 찍기 가장 좋은 곳은 선왕산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하트 해변(하누넘)’이다. 해안선이 영락없이 하트 모양으로 보이는 이 해변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인증샷을 남기는 명소다. 원래 이름인 하누넘은 하늬바람(서풍)이 넘어오는 곳이란 뜻이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하누’를 기다리는 ‘넘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전설로 내려온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의 명소인 하누넘(하트 해변). 선왕산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하트 모양의 해변이 나온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인증샷을 남기고 속삭이는 해변이다. 비금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세돌 9단의 알파고와의 대국을 재현한 조형물.
11일 신안 비금도 이세돌 바둑기념관에서 열린 ‘2024 샴막 예술축제’에서 하비에르국제학교, 서울프랑스학교 학생들과 신안 지역 학생들이 함께 양국의 국가와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당시 조선 조정이 비변사 회의에서 ‘배 두 척을 새로 마련해 이방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내린 결정문을 가져온 나주목사 일행에게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 샤를 드 몽티니가 감사의 뜻으로 내놓은 샴페인과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만찬을 함께 한 것을 재현하는 축제였다.
행사장에는 프랑스 주류회사 페르노리카그룹의 프리미엄급 샴페인 ‘멈(Mumm)’과 ‘페리에 주에(Perrier Jouet)’ 그리고 스파클링 막걸리 하얀술, 해창막걸리 등 양국 대표 술을 마실 수 있는 시음장이 설치됐다. 이날 비가 흩뿌렸지만 주한 프랑스대사관 요안 르 탈레크 문정관을 비롯해 하비에르국제학교 제롬 피노 교장, 서울프랑스학교 세드리크 투아롱 교장, 프랑스 파리 시테대 에마뉘엘 후 교수, 프랑스와 신안군 학생 등 700여 명이 참석해 양국 문화와 음식을 즐겼다.
비금도 ‘샴막 예술축제’에서 샴페인과 막걸리 안주로 인기 있던 ‘1004굴’과 홍어.
이날 샴페인과 막걸리 안주로 가장 인기 있던 음식은 신안의 유명한 ‘1004굴’이었다. 레몬에 곁들여 먹으면 더 잘 어울리는 신안 개체굴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맛볼 수 있는 개체굴 맛을 기억하는 프랑스인들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입맛을 사로잡았다.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우리말과 프랑스어로 번갈아 부르는 무대.
프랑스 국제학교 학생 60여 명 및 신안군 학생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무대에 올라 ‘오! 샹젤리제’ ‘아비뇽 다리 아래에서’ ‘신안 아리랑’을 부르고 소고춤 등을 선보이며 큰 울림을 남겼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는 마포 로르 씨가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프랑스어로 구성지게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11일 비금도에서 열린 샴막 예술축제에서 극단 갯돌이 나르발호 난파 사건을 재현하는 연극.
이날 하이라이트는 신안 주민들과 프랑스인들이 운동장에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비금뜀뛰기 강강술래’를 함께 하는 마지막 순서였다. 양국 학생과 주민들은 손에 손을 잡고 큰 원을 둥그렇게 말았다가 풀었다가, 남대문처럼 높이 들어 통과하면서 강강술래의 의미를 만끽했다.
샴막 예술축제 마지막 순서에서 한국과 프랑스인들이 모두 함께 춘 ‘비금뜀뛰기 강강술래’.
12일 자은도 라마다호텔 그랜드볼룸에서는 ‘한불 문화 예술 교류의 광장, 비금도’ 학술대회도 열렸다. 에마뉘엘 후 교수는 주제 강연에서 “조선 후기 신안 앞바다에서는 외국 선박 100척 이상이 침몰하거나 표착(漂着)했다”며 “나르발호 표류 사건 발생 10년 후 비금도 일대에 또 다른 서양 선박이 표착했는데 앞으로 연구가 계속된다면 신안의 섬과 서양의 만남을 더 깊이 있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신안 샴막 예술축제로 예술의 나라 프랑스와 직접적인 교류의 문을 열 수 있게 돼 무척 기쁘다”면서 “비금도를 한국과 프랑스 청년들의 문화 예술 교류 거점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11일 비금도에서 열린 2024 샴막 예술축제에 참석한 에마뉘엘 후 교수(프랑스 파리 시테대), 강형기 샴막예술축제추진위원장, 김세원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 박우량 신안군수, 마티유 르포 비즈니스프랑스 한국대표, 요안 르 탈레크 주한 프랑스대사관 문정관, 이다 도시 교수(오른쪽) 등이 샴페인과 막걸리 잔을 들고 건배하고 있다.
앤터니 곰리의 설치작품과 뮤지엄이 들어설 예정인 비금도 해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