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초치기 전투’ 외환딜러의 세계… 환율시장 최전선에 있는 외환딜러 초단위 업무 위해 반말-약어 사용… 배달음식으로 끼니 해결도 다반사 냉철한 분석으로 거래하기 위해… 경제-사회-정치 이슈까지 섭렵 “화장실 못갈만큼 바빠도 매력적”… 원-달러 환율 ‘상고하저’ 흐름 전망 연준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이 영향… “외환보유액 확충 등 대비는 필요”
《‘총성 없는 전쟁’ 외환딜러의 세계
시중은행의 외환딜러들은 매일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환율 변동이 심한 날엔 점심도 딜링룸 안에서 해결해야 하고 심지어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간다고 한다. 외환 시장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을 만나봤다.
“2.8에 10개 솔드(sold)!”(1372.8원에 1000만 달러 매도)
“던(done)!”
2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4층 딜링룸 곳곳에서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국내 외환시장 개장과 함께 외환 거래를 하려는 기업들의 전화다. 외환 딜러들은 전화를 받으며 눈앞에 놓인 8개의 모니터로 달러, 유로, 엔화 등 세계 각국의 환율을 즉시 파악해 딜링(거래)을 시작한다. 딜러들이 암호문 같은 환율 호가를 잇달아 외치자 딜링룸은 순식간에 ‘총성 없는 전쟁터’로 변했다.》
2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환율이 초마다 변동하는 탓에 일부 딜러들은 점심을 거르거나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며 자리를 지키는 때가 많다. 최혁중 기자sainman@donga.com
외환 딜러 15년 차인 설종문 하나은행 FX플랫폼사업부 부장은 “매일 외신과 경제 보고서를 들여다보지만 장이 시작되면 환율이 예상치 못하게 튈 때가 많다”며 “장 시작 직전이 제일 긴장되면서도 비장해지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장이 열리자 딜링룸 안에서 직급이 사라졌다. 초 단위로 환율이 바뀌는 탓에 빠른 업무 진행을 위해서 짧은 반말이 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딜러가 “9.8에 50개 솔드!”(1379.8원에 5000만 달러 매도)를 외치자 다른 딜러가 정확히 못 들었는지 “다시!”라고 외쳤다. 환율 호가를 다시 큰 소리로 외치고서야 반대편에서 “던!”이라는 짧은 응답이 돌아왔다.
외환딜러들은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약어’를 사용한다. 예컨대 솔드(sold)는 매도, 보트(bought)는 매수를 뜻한다. 던(done)은 계약이 체결됐다는 의미고, 딜러들이 외환 거래 시 외치는 ‘1개’는 일반적으로 100만 달러를 뜻한다.
외환딜러들은 각자 앞에 놓인 8개의 모니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모니터의 각 화면엔 초 단위로 변하는 환율 그래프와 거래 체결 시스템, 블룸버그 등 외신 사이트 등이 떠 있었다. 한 딜러는 “보기엔 정신없어 보이겠지만 딜러들은 봐야 할 통계나 자료가 많아서 모니터가 더 있었으면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됐지만 딜러들 중 3분의 1가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환율을 따라잡기 위해 딜링룸에 대기조를 남겨둘 수밖에 없다. 남는 이들은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도시락, 샐러드 등을 배달시켜 빠르게 먹고 다시 업무에 돌입했다. 환율 변동이 심한 날엔 대부분 딜링룸에 남아 배달 음식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워야 한다.
오후에도 외환딜러들의 입과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하루에 수백 건의 외환거래를 체결하면서 동시에 블룸버그 등 외신을 점검하며 환율이 변할 요인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예상치 못한 환율 변동성에 두려울 때도”
주요 시중은행들의 외환거래 손실이 대폭 늘어난 것은 지난달 환율이 장중 1400원까지 뛰어오르는 등 변동성이 커지며 환차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외환딜러들은 매초 요동치는 환율을 바탕으로 거래를 진행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시장의 변화에 늘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환율 흐름을 파악해 짧은 시간에 거액을 거래하다 보니 심적 부담이 크고 대규모 손실이 났을 땐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한다.
설 부장은 “오늘 새벽에도 엔화가 갑자기 올라 당황했는데 근무하던 딜러가 안정적으로 대응했다”며 “환율이 갑자기 치솟는 등 시장 흐름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갈 때도 당황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거래를 진행하는 것이 딜러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급변하는 환율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환딜러들은 세계 각국의 경제, 정치, 외교 상황 등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때마다 챙겨 봐야 하는 글로벌 통계나 자료도 한두 개가 아니다. 세계 각국의 기준금리 추이는 물론이고 경제성장률, 소비자물가지수, 고용률, 각종 사회·정치적 이슈까지 모두 꼼꼼히 챙겨야 한다.
이원장 신한은행 S&T센터 팀장은 “시장 흐름을 예측하기 위해 환율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한 자료나 기사를 항상 찾아본다”며 “환율 변동이 심할 때는 퇴근해서도 환율 추이 등을 모니터링하다가 밤을 새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환율이 매초 바뀌는 탓에 업무 시간엔 화장실 가기도 쉽지 않다. 외환 딜러 4년 차인 최은지 KB국민은행 시장운용부 대리는 “일이 정말 바쁠 땐 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잊어버리고 일을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딜링룸 안에서 개인적인 전화나 메시지를 일절 주고받을 수 없다는 점도 딜러들의 애로사항 중 하나다. 거래 정보 등이 유출될 수 있어 보안상의 이유로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을 때 가족들이 딜링룸 사무실로 직접 전화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처럼 바쁜 일상과 고강도 업무에도 은행 내에서 외환딜러의 인기는 꽤 높다. 최 대리는 “(딜러는) 업무가 복잡한 만큼 무엇이든 많이 배울 수 있는 데다 나만의 전문성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은행 내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라며 “특히 젊은 은행원들이 오고 싶어 하는 부서 중 하나”라고 말했다.
● ‘상고하저’ 환율, 하반기 1200원대 전망
취재팀과 인터뷰를 진행한 외환딜러 3명은 모두 올해 원-달러 환율이 ‘상고하저(上高下低)’의 흐름을 보일 것이라며 올해 말 원-달러 환율이 1270∼1290원 사이일 것으로 전망했다.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이 시장의 예상보다 뒤로 밀리면서 상반기(1∼6월) 고환율의 흐름을 보였지만, 하반기(7∼12월)엔 본격적인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이 고조되며 원-달러 환율이 하락세를 보일 것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도 21일 ‘2024년 세계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 하반기로 갈수록 미국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달러화가 약세 전환 압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변수도 상당하다.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과 중동 전쟁에서 촉발된 지정학적 리스크, 올해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선 등 굵직한 이슈가 많아 상황에 따라 원-달러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이슈에 따라 원-달러 환율이 다시 크게 출렁일 수 있는 만큼 전문가들은 외환보유액 확충 등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132억6000만 달러로 3월 말(4192억5000만 달러)보다 59억9000만 달러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원-달러 환율의 급격한 상승을 막기 위해 외환당국이 환율 방어에 나선 데다 금융기관의 외화예수금 등이 감소해 외환보유액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하반기 글로벌 이슈에 따라 환율이 다시 요동칠 수 있는 만큼 정부는 외환보유액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증액해 환율을 안정시키는 등 선제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희 기자 facth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