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우 서울성모병원 교수-만성신부전증 최은영 씨 20대 중반에 진단받고 26년째 투병… 뇌사자 신장 이식 후 첫아이 출산 다시 나빠져 투석 중 둘째 갖게 돼… 치료 횟수 늘리되 시간은 줄이며 39세에 건강한 딸아이 무사히 낳아… 의사-환자 ‘무한 신뢰’ 라포르 결실
26년 전인 20대 중반에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은 최은영 씨(오른쪽)는 신장 이식 두 번과 총 10년 이상의 투석 치료를 모두 이겨내고 두 아이를 건강하게 출산했다. 26년째 최 씨를 진료하는 양철우 서울성모병원 신장내과 교수는 “환자의 건강을 돕는 게 의사 역할이다. 최 씨가 스스로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최 씨가 투병 과정에서 보여 준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주부 최은영 씨(50)는 중학생 시절 신(腎)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단백뇨가 나오고 몸이 부으며 저(低)알부민혈증이 발생하는 병이다. 당시 최 씨의 체중은 62kg이었다. 의사는 체중부터 빼라고 했다. 이뇨제를 먹어 가면서 일주일 새 10kg을 뺐다. 그 덕분이었을까. 몸이 조금은 좋아진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최 씨는 ‘조심’이란 단어를 늘 새기며 일상생활을 해 나갔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후 너무 바빠진 데다 개인적 사정으로 병원에 갈 수 없게 됐다. 그 대신 이뇨제를 먹으면서 스스로 관리했다. 다행히 이상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최 씨는 건강한 상태로 대학을 졸업했다. 이대로 신장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혼 준비로 힘든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강도가 더 심해졌다. 최 씨는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만성신부전증 진단이 떨어졌다. 당장 처치가 필요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의료진은 최 씨를 입원시킨 뒤 곧바로 신장 투석을 진행했다. 이후 의료진은 최 씨를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양철우 서울성모병원 신장내과 교수가 최 씨 진료를 맡았다.
양 교수는 “최 씨뿐 아니라 만성신부전증 환자 상당수가 숨이 차고 어지러운 원인이 신장 질환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신장 기능이 떨어지면 노폐물이 제때 배출되지 못해 여러 증세가 나타나는 요독증이 발생한다. 하지만 숨이 찬 증세 때문에 심장 질환으로 오해한다는 것. 양 교수는 “일단 요독증이 나타나면 신장 기능은 5∼10% 정도 남았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만약 소변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면 신장 기능은 5%도 남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혈액 투석을 하는 중에도 신장 기능은 떨어졌다. 신장 이식 외에는 해법이 없는 상태. 뇌사자 장기 이식을 기다리며 버텼다. 얼마 후 최 씨와 조직 적합도가 높은 뇌사자 신장이 나왔다. 1999년 10월, 최 씨는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최 씨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당시만 해도 뇌사자를 발굴한 병원에 장기 이식 우선순위가 주어졌다. 서울성모병원이 발굴한 뇌사자였으니 이 병원 환자인 최 씨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최 씨는 아직 20대로 젊었고 신장 이식이 당장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점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뇌사자 신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장기 이식 거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최 씨는 다시 건강해졌다. 그러자 아이를 갖고 싶은 열망이 커졌다. 하지만 임신이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양 교수는 “신장을 이식받았다면 임신 고위험군에 해당한다. 임신중독이 생길 위험도 커진다”고 말했다. 이 경우 임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식한 신장까지 손상될 수 있다.
하지만 최 씨 부부는 아이를 진정으로 원했다. 양 교수는 최 씨가 임신할 수 있는 상태인지 살폈다. 일단 거부 반응은 없는 상황. 단백뇨가 나오거나 혈압이 높지도 않았다. 양 교수는 잘 관리하면 임신 출산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정말 이 판단대로 됐다. 2003년, 최 씨 부부는 그토록 원하던 아기를 가졌다. 2004년 6월에는 남자 아기를 무사히 출산했다. 하지만 출산의 기쁨도 잠시. 최 씨 건강이 악화했다. 출산이 임박할 때부터 신장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출산 후 급속도로 나빠졌다. 검사해 보니 신장의 30% 정도가 망가져 있었다.
약물 복용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장기를 이식하면 12시간 단위로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한다.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야 약물 농도를 유지할 수 있다. 복용 시간이 이르거나 늦춰지면 농도가 달라져 면역 거부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최 씨의 경우 출산한 후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서 약 복용 시간을 가끔 지키지 못했다.
● 투석하며 둘째 출산
최 씨는 그 후 매주 세 번씩 병원을 찾아 투석 치료를 받았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흘렀다. 그렇게 힘겨운 투석 치료를 7년째 이어가던 2012년 말, 최 씨는 샤워하다가 배 안에서 아기가 꿈틀대는 걸 느꼈다. 둘째 아이 임신이었다. 검사해 보니 이미 임신 5개월을 넘긴 상태였다. 입덧이 없어서 최 씨가 임신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두 번째 임신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오랫동안 투석 치료를 받았기에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영양 상태는 썩 좋지 않았고 호르몬 균형도 깨져 있었다. 임신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란 뜻이다. 양 교수도 놀랐다. 양 교수는 “투석 치료 중에 임신은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임신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10개월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연 유산한다. 출산한다면 그 자체가 의학계에 보고될 만한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 씨는 둘째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출산을 결심했다. 양 교수가 보니 태아는 이미 상당히 성숙했고 발육 상태가 좋았다. 산모인 최 씨는 임신중독 징후가 없었다. 양 교수도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양 교수는 해외 치료 사례를 수집했다. 데이터를 분석한 뒤 치료법을 재점검했다. 우선 투석 치료 일정부터 조정했다. 그전에는 매주 3회, 각 4시간씩 투석을 했다. 이를 주 6회로 늘리는 대신 투석 시간을 3시간으로 줄였다. 태아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폐물을 조금씩 자주 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와 함께 조 씨 혈압이 정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했고, 조혈호르몬 투여량을 늘려 빈혈을 없앴다. 체중도 다른 산모와 비슷한 수준으로까지 늘렸다.
산모와 의료진 모두가 힘을 합쳤다. 2013년 3월, 최 씨는 39세에 둘째 공주를 무사히 출산했다.
● 의사와 환자, 평생 동반자
보통 의사와 환자 사이의 라포르(rapport·친밀함)가 좋을 때 치료 효과도 좋다는 말이 있다. 최 씨와 양 교수가 그렇다. 최 씨는 양 교수를 무한 신뢰했고 그런 최 씨를 양 교수는 가족처럼 대했다. 양 교수는 “의사와 환자로 만난 지 2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최 씨가 24세로 보인다”며 웃었다.
양 교수는 “의사는 환자가 건강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환자의 노력이 보태질 때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덧붙였다. 최 씨가 26년 동안 혈액 투석을 해 왔지만 꿋꿋하게 버티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최 씨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란다.
실제로 둘째 아이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최 씨는 7년째 투석 치료를 받고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투석하지 않는 날에는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에어로빅도 열심히 했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투석 치료를 오래 하다 보면 요독이 쌓이면서 여러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최 씨는 그런 증세가 덜했다. 아기를 키우면서 삶에 대한 욕구도 더 강해졌다. 이 모든 점이 최 씨가 투석을 극복하고 아기까지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올해 1월 최 씨에게 행운이 다시 찾아왔다. 뇌사자 신장 재이식 수술을 받게 된 것. 현재까지 거부 반응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양 교수는 “1년 이내에 거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10년 이상 장기가 유지될 확률이 90%를 넘는다.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물론 최 씨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 아무래도 면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날음식은 절대 먹지 않고 채소도 익혀 먹는다. 운동도 빠뜨리지 않는다. 매주 2회 필라테스를 하고, 매일 5000보 이상 걷는다. 살이 찌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다 보면 식욕이 당기는데, 이때 무작정 먹었다가 살이 찌면 콩팥에 악영향을 미친다. 최 씨는 “몇몇 제약이 있긴 하지만 지금 아주 평화롭다. 이대로만 잘 유지할 계획”이라며 웃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