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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이 된 광릉숲…25살 국립수목원의 생일 음악회[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입력 | 2024-05-25 07:00:00


24일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 전나무숲에서 열린 국립수목원 개원 25주년 기념 ‘숲과 나무 음악회’. 스콧 큐엘라 미 시라큐스대 교수가 ‘여름 정원’이라는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있다.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전나무 숲길 한가운데에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광릉숲은 ‘피아노의 숲’이 되었다.

국립수목원이 24일 작은 숲속 음악회를 열었다. 그랜드 피아노를 숲길에 놓고 음악회를 연 것은 국립수목원 역사상 처음이다. 음악회 제목은 ‘피아니스트 임미정과 친구들 초청 숲과 나무 음악회’. 이날 25주년 생일을 맞은 국립수목원은 최근 방문객들에게 참가 신청을 받은 뒤 추첨을 통해 30명을 초대했다.

이날 음악회를 기획한 임미정 DMZ 오픈 페스티벌 예술감독.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임미정 씨가 청중들에게 말했다. “숲속은 생명이 자라는 곳이잖아요. 여러분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새 소리, 바람 소리도 함께 듣게 될 거예요. 일반적으로 다른 음악회들에서는 연주가 진행될 동안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게 금지되지만, 자연 속인 여기서는 마음껏 음악과 하나가 되세요.”

그는 자연과 가까운 음악가라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545를 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선율이 각종 새 소리, 전나무 숲길 옆을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어우러져 새로운 화음을 만들어냈다.

피아니스트인 임미정 감독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다.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한혜열 성악가(베이스)가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을 역임한 윤호근 음악가의 피아노에 맞춰 우리 가곡을 부를 때에는 바람이 불어 악보가 날아갈 뻔하기도 했다. 숲길에 그저 그랜드 피아노 한 대만이 오롯이 놓여 있을 때부터 예감했다. 자연 속에서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리라는 것을. 인근 주민이라는 청중 김미자 씨(72)는 “평소 자주 다니는 수목원이지만 오늘의 감동은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날 열린 숲속 음악회에서는 음악이 새, 물, 바람 소리와 어우러지는 화음을 감상할 수 있었다.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임미정 씨는 2018년 강원 양구군 국립DMZ자생식물원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연 것을 계기로 이날 국립수목원 25주년 작은 숲속 음악회에 서게 됐다. 스콧 큐엘라 미국 뉴욕 시라큐스대 교수, 윤호근·한혜열 한세대 교수가 이날 음악회를 함께 꾸민 그의 친구들이었다. 임 씨는 2019년부터 강원도 DMZ(비무장지대) 접경 지역에서 PLZ(Peace and Life Zone)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경기도 DMZ 오픈 페스티벌 총감독도 지냈다. 청년 예술가들을 미얀마에 파견하는 코이카 프로젝트 봉사단 사업 등 자연 속에서 새로운 장르와 융합문화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임미정 감독(왼쪽에서 두 번째)과 그의 음악 친구들.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날 국립수목원은 ‘융복합 연구혁신으로 산림생물의 무한 가치를 창출하는 국가대표 연구기관’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선포했다. 오랜 세월의 더께를 지닌 전나무 숲길을 개방해 그동안 없던 숲속 음악회를 연 것도 이 비전에 따른 것이다. 앞으로 인문학과 예술을 숲에 접목한 융복합 콘텐츠로 국립수목원의 가치를 널리 홍보하겠다고 한다.

국립수목원 전나무숲은 강원 평창 월정사 전나무숲, 전북 부안 내소사 전나무숲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으로 통한다. 1915년부터 전나무를 심기 시작해 1970년 박정희 대통령, 1997년 김영삼 대통령,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전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을 이뤘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를 동안 자꾸만 저절로 하늘을 올려다보게 됐다. 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모든 순간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고마운 사실을 일깨웠다.

한혜열 성악가(오른쪽)가 윤호근 음악가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우리 가곡을 부르고 있다.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바람결에 실린 우리 가곡 ‘마중’과 ‘시간에 기대어’를 들으면서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피아노의 숲’이 아닌 일반 공연장의 무대였어도 이렇게 노랫말이 별처럼 찾아와 마음 속에 박혔을까.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마중’에서)

‘저 언덕 넘어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긴 어딘가. 우리는 남아 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너와 난 외로운 사람.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뜨겁게 태우던 우리의 마음도 사랑하오(중략).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시간에 기대어’ 에서)

임영석 국립수목원장은 “숲속 음악회처럼 숲이 예술과 만나는 새로운 시도들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임영석 국립수목원장은 말했다. “흔히 음악회라고 하면 어떠한 소음도 허락하지 않는 상황을 떠올리지만, 오늘의 음악회는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숲속 음악회는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마음을 풀어놓고 감각에 집중할 수 있어 청중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숲속의 다양한 생물들이 좋은 음악에 아름다운 화음으로 답을 해 준 게 아닐까요. 이런 도전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국립수목원 전나무 숲속에 내려앉은 ‘한 편의 음악영화’가 마음속에 오래오래 여운을 남긴다. 그랜드피아노의 건반을 가만히 두드려 보았다. ‘도도레도 파미’. 해피 버스데이, 25살 국립수목원!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