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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받아 마땅한 이들[내가 만난 명문장/다니엘 튜더]

입력 | 2024-05-26 22:51:00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를 원한다.”

―의친왕 이강이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낸 편지 내용 중



다니엘 튜더 작가·전 이코노미스트 한국특파원

보편적 인식에 따르면 한국 왕실은 고종으로 끝납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패와 문화적 보수주의, 변화에 대한 저항, 그리고 파벌주의로 인해 왕실이 약화되었고, 일본이 이러한 상황들을 틈타 조선을 부당하게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왕실은 최악의 경우 공모자로, 최선의 경우 무능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종 이후의 왕실에 대해서는 조명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곤 합니다.

역사를 ‘수정’하는 일은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지만, 저는 고종의 둘째 아들(엄밀히 말하면 성년에 이르는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지금보다는 나은 해석을 부여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 편지는 의친왕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한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그 극적이고 대담한 망명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요.

의친왕 이강은 종종 ‘파락호’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 때론 자유도 포기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만났다는 여러 증거가 있으며, 미국에서 초기 한국인 ‘유학파’ 중 하나였던 그는 김규식 같은 인물들과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와 긴밀한 관계였던 김란사(하란사라고도 알려짐)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최초의 ‘신여성’ 롤모델이자 교육자였지만,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길에 베이징에서 독살당했습니다. 의친왕 이강과 김란사, 그들이 시도한 독립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의지는 보다 조명받아 마땅하지 않을까요?

다니엘 튜더 작가·전 이코노미스트 한국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