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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세트 같은 한국 고속성장, 그림자를 철거했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4-05-26 22:54:00

<84> 그림자의 의미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실감 나게 표현한 이탈리아 화가 마사초 ‘낙원으로부터의 추방’(1425년경).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Plinius)는 ‘박물지’에서 회화는 그림자의 윤곽을 그리면서 탄생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자가 서양 회화사에서 계속 중시된 것은 아니다. 중세 종교화에서 그림자의 흔적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중세 종교화 속에 등장하는 각종 성인들, 순교자들, 그리고 아담과 이브는 그림자가 없기에 현실 속 인물이라기보다는 영원 속에 박제된 인물처럼 보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서야 그림자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그림자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기를 포착하고자 한 예술가들의 집요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예배당에 그려진 마사초(Masaccio·1401∼1428)의 ‘낙원으로부터 추방’을 보라. 같은 소재를 그린 중세 시대 그림들에 비해, 마사초의 그림은 훨씬 더 깊은 정서적 울림을 준다. 거기에는 아담과 이브의 고통스러운 자세와 표정이 큰 역할을 한다.

그 자세와 표정이 그토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른쪽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인해 생기는 얼굴의 음영, 그리고 길게 드리운 육체의 그림자 때문이다. 이처럼 마사초는 명암(과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리스도교 종교화에 깊이를 더했다.

그림자가 상징하는 인간적 번뇌는 원래 살던 에덴동산에서는 불필요했던 것. 이토록 통렬한 번뇌와 좌절은 낙원에서 추방된 존재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이제 아담과 이브는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 아이를 낳고 노동을 해야 한다.

먹고살기 위한 끝없는 노동의 시간,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과로의 시간이 그들을 기다린다. 실로,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출근하고, 욕먹고, 욕하고, 퇴근하고, 장보고, 익히고,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다 보면, 종일 일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온다, 아주 둔중하게 온다. 둔기로 만든 죽비가 어깻죽지를 내려치듯이 온다. 인간으로 사는 것은 실로 개고생이로구나! 아담과 이브에게 노동과 출산과 육아는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 속세에서 고된 노동을 통해 낙원은 아니더라도 낙원 비슷한 곳, 낙원 비슷한 곳은 아니더라도,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삶의 터전을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숙명이자, 인류의 역사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한국인도 바로 그러한 삶의 터전을 가꾸기 위해 한 세기 이상 분투해 왔다. 그것도 아주 과도하게 분투해 왔다. 단시간에 고속 성장을 한 나라답게 거기에는 성취뿐만 아니라 실패도,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도, 환한 빛뿐만 아니라 짙은 어둠도 드리워져 있다.

사진작가 강홍구는 바로 그러한 현대 한국의 모습을 수십 년간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드라마 세트 연작이다. 우연히 경기 의정부에 있는 드라마 세트장을 본 강홍구는 중얼거렸다. “물론 그 건물이 가짜 세트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현대 한국의 제도들이 가건물 같다고 느껴 왔기 때문에, 강홍구가 찍은 드라마 세트장 속 가건물들은 현대 한국에 대한 더없이 적절한 비유로 보인다. 꼼꼼히 현대적 삶을 숙고할 시간과 여유가 없었기에 후다닥 빠른 속도로 가건물이나마 지었고, 거기서 현대성을 쟁취하기 위한 거대한 막장 드라마가 펼쳐졌다. 그것이 바로 한국 현대사다.

강홍구 사진작가의 ‘드라마 세트1’(2002년). 드라마 촬영장 사진에 인물을 합성한 것이다. 작가는 인물이 가짜임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그림자를 삭제했다. 사진 출처 박건희 문화재단 홈페이지

강홍구의 작품 ‘드라마 세트 1’에 등장하는 인물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강홍구는 실제 세트장에 있는 사람을 찍은 것이 아니라 별도의 사람 이미지를 합성했고, 그것이 가짜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그림자를 삭제했다. 강홍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지극히 무의미한 가짜 사진들을 만들고 싶었다. 미술 작품을 둘러싼 제도와 말과 이론들이 너무 짜증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사진들이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황당무계하기를 바랐다.”

비약적인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의 모습이 가짜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바로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경제 성장을 위해 삶을 단순화했을 때, 새 아파트를 짓기 위해 오랜 삶의 터전을 순식간에 철거했을 때, 도시의 전면에서 빈자들을 하루아침에 밀어냈을 때, 정치적 이유로 역사를 너무 단조롭게 서술했을 때, 경제 성장만을 성장의 거의 유일한 척도로 삼았을 때, 현대 한국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 빛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의 그림자를 철거했을 때, 한국은 뭔가 번쩍이는 가짜처럼 변한 게 아닐까.

헝가리 태생의 미국 사진작가 앙드레 케르테스 ‘파리의 그림자’(1931년). 머리 위에서 찍어 인물이 잘 안 보이지만, 커다란 그림자 덕에 아이들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출처 시카고 미술관 홈페이지

헝가리 태생의 미국 사진가 앙드레 케르테스의 작품 ‘파리의 그림자’(1931년)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라. 스튜디오가 아닌 파리의 실제 거리에서 순간 포착한 이 사진에는 이동 중인 아이들의 실물과 그림자가 풍성한 입체성을 만들고 있기에 진짜처럼 보인다. 인물의 머리 위에서 찍었기에, 머리통만 보아서는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그림자를 통해서 그들이 등교 중인 아이들이라는 점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그림자로 인해 그들은 훨씬 더 커 보인다. 인간은 그림자와 더불어 성장해 나갈 것이다. 상연하기 위한 드라마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성장해 갈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