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른다’는 뜻의 ‘등산(登山)’이라는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듯하다. 정상에 계속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선택이지만 올라간 사람은 내려와야 한다. 동네 뒷산이라도 한 번 올라본 사람은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사고가 많이 난다는 것을 안다. 등산의 목적이 정상에 오르는 것이더라도 목표는 무사히 산을 내려오는 것이어야 한다.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
● 퇴직연금 엔진, DB-DC형에서 IRP로 이동 중
산꼭대기에 오르면 내려와야 하듯이, 은퇴 이후에는 축적한 노후자금을 꺼내 생활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의 대량 퇴직이 본격화되면서 퇴직연금 시장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IRP 적립금이 빠르게 늘어난 데는 2가지 원인이 있다. 먼저 지난해 정부가 IRP 저축금액에 대한 세액공제 한도를 700만 원에서 900만 원으로 확대한 것이 한몫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변화의 원인은 베이비부머의 대량 퇴직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베이비부머가 퇴직하면서 DB형과 DC형에 쌓아 두었던 적립금을 IRP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DB형과 DC형 적립금의 성장세는 둔화되고, IRP 적립금의 성장세는 가속화되고 있다.
● 연금 선택 비율, 금액 기준 50% 육박
퇴직자가 IRP에 이체한 퇴직급여는 만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할 수 있다. 그렇다면 IRP에서 연금 수령 비율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퇴직연금 수급을 시작한 IRP 계좌는 약 53만 개인데, 이 중 89.6%(47만4540좌)가 일시금을 선택했고, 연금을 선택한 계좌는 10.4%(5만5124좌)에 그쳤다. 연금 수급 비율은 2021년 4.3%에서 지난해 10.4%로 2년 동안 2.4배로 늘어났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연금 수령 금액이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급을 개시한 계좌의 적립금 규모는 약 15조5000억 원이다. 이 중 연금을 선택한 계좌의 적립금이 7조7040억 원으로 절반을 차지한다. 계좌 수 기준으로는 10% 남짓밖에 안 되던 연금 수령 비율이 금액 기준으로는 50%에 육박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연금 수령 계좌의 적립금이 일시금 수령 계좌 적립금보다 커야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일시금 수령을 선택한 계좌의 평균 수령액은 1645만 원인 데 반해 연금 수령을 선택한 계좌의 평균 수령액은 1억3976만 원이나 된다.
● 절세와 건보료 부담 덜려고 연금 선택
퇴직금 규모가 커지면서 퇴직금을 수령할 때 세금과 건강보험료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퇴직금을 일시금 대신 연금으로 수령하면 3가지 혜택이 있다. 첫째, 퇴직소득세를 30∼40% 감면받는다. 퇴직소득세율이 10%라면, 연금으로 수령할 때는 연금액의 7%(11년 차부터는 6%)만 세금으로 납부하면 된다.
둘째, 운용 수익에 대한 세금을 절감할 수 있다. 퇴직금을 일시에 수령해 예금 등 금융상품에 맡겨 두었다고 해보자. 이 경우 금융상품에서 발생한 이자와 배당 수입에 15.4%의 소득세가 부과된다. 하지만 운용 수익을 연금으로 수령하는 경우에는 낮은 세율(3.3∼5.5%)만 연금소득세가 부과된다.
셋째, 건강보험료 부담을 덜 수 있다. 퇴직하면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전환해 건강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 이때 일반 금융상품에 발생한 이자와 배당이 한 해 1000만 원을 초과하는 경우 해당 이자와 배당소득 전체에 건강보험료가 부과된다. 반면 퇴직연금과 같은 사적연금소득에서 발생한 운용 수익에는 건강보험료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