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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칼럼]대통령 뒤에 숨은 前 국방장관

입력 | 2024-05-26 23:21:00

격노든 질책이든 본인 결재 번복해 놓고
자기 保身에만 급급… 의혹 눈덩이 만들어
장관의 ‘권한과 책임’ 망각한 것 아닌가
탄핵의 위험한 정치곡예 막을 용기 보이길



정용관 논설실장


해병대원 채 상병 특검 재의결을 앞두고 야권에서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탄핵 열차 시동” “탄핵 마일리지” “T익스프레스(탄핵 급행열차)” 등의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채 상병 사건 처리 문제가 탄핵 사유가 되는지, 또 현실성이 있는 얘기인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선 특검을 탄핵의 징검다리로 삼으려는 음험한 시도에 찜찜함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권의 4·10총선 참패 직후 칼럼에서 필자는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 국방장관의 결재 번복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장 잘 아는 당사자는 대통령 자신일 것”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그날의 진실을 선제적으로 솔직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썼다. 지난해 7월 31일 용산 회의에서 대통령이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는 이른바 ‘VIP 격노설’의 진실이다.

대통령 기자회견까지 거쳤으나 지금까지도 어떤 내용의 격노, 혹은 질책이 있었는지 추측만 무성하다. 국민은 ‘사망 사고 처리’에 대한 질책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데, 대통령은 ‘사망 사고 자체’에 대한 질책만 언급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도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대응과는 별개로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이종섭 전 국방장관의 처신이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이지만 재난 대응 같은 평시의 군 업무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장관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병대 수사단의 경찰 이첩 보고서에 결재를 한 당사자도 국방장관이다. 애초 수사단의 보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보완을 지시하고 결재를 미뤘으면 될 일이다. “해외 출국(우즈베키스탄 출장) 준비에 바빠서…”라는 게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진짜 그랬다면 무능함을 드러낸 것이다.

현재까지의 정황을 볼 때 갑작스러운 해병대 수사단의 브리핑 취소, 자료 이첩 보류 지시 등은 용산의 개입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 해도 이 전 장관의 책임이 면해지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회의에서 격노했는지, 언성을 높였는지, 장관과 직접 통화를 했는지, 어떤 구체적인 지시까지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설령 대통령의 질책이 있었다 해도 이를 어떻게 수용할지는 오롯이 ‘장관의 몫’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이런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즉자적 의견을 내놓는 게 적절하냐의 문제는 논외로 치자. 대통령이 야단을 쳤다 해도 “이미 결재까지 한 사안이니 이를 번복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끝까지 잘 관리하겠으니 맡겨 주십시오”라고 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흐르진 않았을 것이다. 번복 사유를 수사단장에게 납득시키지도 못하고, 항명 논란까지 벌어졌으니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한 책임 역시 이 전 장관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당사자에겐 얼마나 서슬 퍼렇게 다가올지 짐작만 할 뿐이다. “이러면 누가 사단장 할 수 있겠느냐”는 말에 뒤늦게 “아차” 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위가 어찌 됐든 자기 판단으로 결재를 해놓고 하루 만에 뒤집은 장본인이 이 전 장관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원래 순응형 인물인지, 말 못할 고뇌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공수처가 해병대 사령관의 휴대전화에서 ‘VIP 격노설’이 언급된 녹취파일을 확보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 전 장관 측은 “대통령의 격노를 접한 사실이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 또한 말장난 같다. 그럼 차분한 지시는 있었다는 건지, 용산의 누군가와 통화를 한 사실은 있는지 여전히 모호하다. 이러니 대통령을 보호하는 척하며 실은 그 뒤로 숨는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것이다.

채 상병 사건이 이렇게 커진 건 대통령 질책 자체보다는 권력이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가진 쪽에서 먼저 큰 틀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밝히는 게 채 상병 사건의 꼬인 매듭을 푸는 첫 단추다. 어느 선에서 이첩 자료 회수 등의 조치가 이뤄졌는지 등에 대한 세세한 사실관계, 그에 따른 책임 소재와 법리적 다툼은 그다음 일이다.

이번 사건의 권한과 책임은 애초 국방장관의 몫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국민이 정부에 기대하는 ‘책임의 수준’이란 게 있다. 그 점에서 이 전 장관의 그간 행보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이제라도 한때 국방 수장으로서 온전히 책임질 건 책임지겠다는 용기를 보일 필요가 있다. 그게 여의도에서 슬슬 불거지기 시작한 탄핵의 위험한 정치 곡예를 막는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