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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립해 조기퇴직 ‘파이어족’, 쇼펜하우어와 닮았다[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때]

입력 | 2024-05-27 22:24:00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항산(恒産)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항심((恒心)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씀이 있다.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과 생업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돈이 없다면 자신의 도덕심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2021년 미국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한국인이 유일하게 돈이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졌다고 한다. 다른 나라는 건강과 가족을 더 가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여론조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충격적인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물질적인 풍요’의 조건인 돈을 1순위로 꼽은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돈을 가장 밝히는 민족’이라는 자학에 가까운 부끄러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쇼펜하우어도 돈의 가치와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었다. 그는 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돈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돈을 ‘공기’처럼 소중하게 여긴다. 재화는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진짜 부자는 돈을 자신의 ‘생명’처럼 지키기 위해 소비를 줄이면서 검소하며 매사에 신중하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빈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돈을 벌더라도 과시와 향락에 낭비하는 가짜 부자가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재산을 물려받든, 취득하든 부자가 되면 돈을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잘 관리하는 데 더 애쓰라고 조언한다.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갖는다고 반드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한 경우에는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 고통을 겪지만 돈이 너무 많은 경우에는 빈둥거리며 놀다가 ‘무료함’이라는 지옥을 겪게 된다고 한다.

한국은 유교적 가치가 지배하기 때문에 가족이 중심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근대화를 거치면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연대보다는 각자의 생존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또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식의 심리가 돈에 대한 소유 경쟁을 더 부추겨 ‘돈을 얼마나 갖는냐’가 ‘남보다 얼마나 더 가지느냐’의 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벼락부자’라는 신조어도 나오게 되었다.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생겨난, 돈이 최고라는 인식 때문에 우리 사회에 배금주의적, 물질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한 것은 사실이다.

최근 투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MZ 세대들이 쇼펜하우어에 매료되는 이유는 그의 확실한 경제 관념 때문이다. 경제적인 자유를 실현한 ‘파이어족’이 부를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는 데 사용하려는 점은 쇼펜하우어와 닮아 있다. 돈과 재산을 갖고자 하는 욕망 자체는 나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외적 좋음’으로 부를 인정했듯이 돈은 인간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다만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주는 돈을 소유하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쇼펜하우어도 경제적인 여유가 주는 자유 덕분에 평생 깊은 사유함을 통해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