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총선거를 약 보름 앞뒀던 올 3월 24일 민주당 이재명 대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울 송파구에서 유세하며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22대 국회가 열리면 정부에 이를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사진공동취재단
출생아 23만 명에게 5000만 원씩 줄 수 있습니다. 저소득층 긴급복지 지원금을 36배로 늘릴 수 있습니다.코로나19 때 ‘게임 체인저’였던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기술을 국산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도 11조4000억 원이 남습니다. ‘간병 살인’ 부르는 간병비를 전액 국가가 책임지고도 거스름돈이 3조 원 남습니다.
즉, 전 국민에 25만 원을 주는 게 정당화되려면 위에 나열한 용처보다 더 시급하고 효과도 크다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과연 그런 효과를 확신할 수 있는지, 국회가 더 서둘러야 할 일이 있는 게 아닌지 살펴봤습니다.
저는 바보가 아니므로 민생회복지원금이 단순히 돈을 주는 것 말고도 어떤 효과를 낼지 근거를 찾아봤습니다. 먼저, 이 대표의 주장처럼 소비 진작과 소상공인 지원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할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비슷한 ‘실험’이 이미 이뤄진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4·15총선을 약 보름 앞두고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긴급재난지원금입니다. 원래 소득 하위 70%에 준다고 했다가 국회 심의를 거치며 대상이 전 국민으로 늘어났습니다. 모든 가구에 40만~100만 원을 지급하는 데 총 14조3000억 원이 들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20년 전 국민에게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의 소비 진작 효과를 분석한 결과 정책 목표였던 소상공인 지원 효과가 미미했다고 봤습니다. 다른 연구에서는 지원금 지급이 끝난 후 오히려 대형 업체와 소상공인의 수입 차이가 더 벌어졌다는 결과도 나왔습니다. KDI ‘1차 긴급재난지원금 정책의 효과와 시사점’ 보고서
또 2021년 8월 대한경영학회지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은 사람은 소비를 미리 앞당겨서 하고 그 이후엔 오히려 지출을 줄였다고 합니다. 특히 유통업계에선 지원금 종료 이후 오히려 대형 온라인 매장 소비와 소상공인 매장의 카드 사용액 격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연구진은 “소상공인 간접 지원의 정책 효과가 크지 않았다”고 해석했습니다.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전 국민 대상 현금 지원이 ‘소비 진작과 소상공인 지원을 통한 경제 활성화’라는 효과가 낼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학자들은 ‘물가 안정을 도리어 늦출 수 있다’고 우려하거나 ‘차라리 선별 지원이 낫지 않냐’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 남는 건 ‘부의 재분배’ 효과입니다. 전 국민에게 현금성 소비 쿠폰을 배포할 땐 돈이 흐를 방향을 크게 세 갈래로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고소득층→저소득층’입니다. 다르게 걷어서 똑같이 나눠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사원→자영업자’입니다. 지역화폐의 용처가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셋째, ‘법인→개인’입니다. 세금은 법인(기업)도 내지만 쿠폰을 받는 건 개인이니까요.
이중 둘째(회사원→자영업자)는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때 효과가 작다고 결론 났습니다. 셋째(법인→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현금 살포의 반사이익을 누리지 못한 기업이 직원 월급을 줄이거나 물건값을 올리는 방식으로 손익을 맞추면 결국 소비자 이익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는 건 첫째 효과, 고소득층의 부를 저소득층에 나누는 겁니다. 복지 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에서 이런 정책 목표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13조 원이면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잠정 집계)에게 5000만 원씩 줄 수 있습니다. 총 11조5000억 원이 들어가니 1조5000억 원이나 남네요.
2월 5일 서울 중구 부영그룹 본사에서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가운데)이 쌍둥이 자매를 둔 직원 가족에게 출산장려금 2억 원을 지급하면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민생회복지원금 소요 예산 13조 원이면 전국 모든 출생아에게 5000만 원씩 주고도 1조5000억 원이 남습니다. 부영그룹 제공
거스름돈에 해당하는 3310억 원만으로도 ‘첫만남이용권’의 지급액을 2배 가까이로 늘릴 수 있습니다. 생애 초기 아동 양육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한 정책이죠. 현재 출생 아동에게 200만 원을 주는 데 총 3804억 원이 듭니다.
13조 원이면 0, 1세 아동을 둔 부모에게 주는 ‘부모급여’ 지급 예산도 몇 배로 키울 수 있습니다. 출산과 양육으로 손실되는 소득을 보전하고 밀착 돌봄이 중요한 영아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매달 0세 아동 가정에 100만 원, 1세 아동 가정에 50만 원을 각각 주는 정책입니다. 여기 드는 예산이 2조8887억 원입니다. 13조 원이면 0세 가정에 매달 450만 원을 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정부는 기초생활 생계급여 예산을 지난해 6조141억 원에서 올해 7조5411억 원으로 늘렸습니다. 한 해 만에 관련 예산을 25% 넘게 늘린 건 처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민생회복지원금 소요 예산 13조 원을 전부 기초생활 생계급여에 투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소득층이 받는 혜택이 무려 3배 가까이로 늘어납니다. 한 마디로 빈곤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는 겁니다. 소득 재분배를 통한 빈곤의 해소. 이게 바로 민주당 강령에 적시된 “단절 없는 맞춤형 기본생활 보장 정책”이 아닌가요.
고독사한 30대 남성의 자취방에 있는 냉장고 내부가 텅 비어 있습니다. 복지 사각의 비극이 반복될 때마다 갑작스레 생계가 어려워진 이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관련 지원을 키우자는 지적이 나왔지만, 예산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일쑤였습니다. 만약 13조 원을 긴급복지 지원에 쓰면 관련 사업비를 무려 36배로 늘릴 수 있습니다. 특수청소업체 에버그린 제공
아니면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건 어떨까요. 저소득 중증 장애인에게 매달 32만~42만 원을 주는 장애인연금과 저소득 경증 장애인에게 월 3만~6만 원을 주는 장애수당의 올해 예산을 다 합해도 1조 원입니다. 이걸 13배로 늘리면 우리나라는 단숨에 장애인에겐 북유럽 못잖은 복지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간병비는 ‘초고령 한국’의 큰 고민 중 하나입니다. 간병비는 2015년 이후 일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도입 병동에서 건강보험이 적용됐지만 대체로 건보 제도 바깥에 있습니다.
정부가 올해 요양병원 간병지원 시범사업을 처음으로 벌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요양병원 20곳의 환자 1200여 명의 간병비를 일부 지원하는 데 85억 원을 쓰기로 했습니다. 시범사업부터 하는 건 ‘간병이 공짜’라고 하면 불필요한 간병 수요까지 생길 것을 우려해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큰 재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치매 등을 앓는 고령 환자가 많아져서죠.
그런데 13조 원이 있으면 시범사업을 건너뛰고 곧장 사적 간병비를 바로 국가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국내 한 연구에 따르면 연간 사적 간병비는 2008년 3조6000억 원에서 2018년 8조 원, 2022년 10조 원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12월 28일 청와대 여민관 영상회의실에서 스테판 방셀 모더나 최고경영자(CEO·오른쪽 화면)와 화상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이날 통화를 통해 2000만 명 분량의 코로나19 백신을 조기 공급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죠. 하지만 실제로는 수 차례 공급 차질을 겪으며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가 현지로 날아가 사실상 ‘읍소’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보건 안보의 핵심인 ‘백신 주권’을 쥐지 못해 생긴 일입니다. 청와대 제공
정부는 1년 전 코로나19 위기 종식을 선언하며 “신종 감염병 발생 이후 100일 이내에 mRNA 백신을 개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년간 327억 원을 들여 활동한 국가 mRNA 백신개발사업단은 다음 달이면 활동을 종료합니다. 추가 사업 예산이 전부 삭감됐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본은 약 1700억 엔(1조5000억 원)을 투자해서 지난해 자체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mRNA 백신은 일단 플랫폼을 갖춰두면 코로나19와 다른 감염병이 유행해도 그것에 맞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생회복지원금은 포퓰리즘 정책조차도 아닙니다. 국민 대다수가 ‘그걸 왜 하냐’는 의문을 갖는 포퓰리즘 정책이 어딨겠습니까. 오히려 이 대표의 대통령 선거 공약이었던 ‘기본소득’의 예고편이라는 일각의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돈을 푸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전례를 만드는 작업이라는 해석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저는 소득 재분배를 위한 현금 지원 자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초생활 보장이나 긴급복지처럼 이미 빈곤 완화를 위한 제도가 있고 그 전달체계가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는데 굳이 돈도 더 많이 들고 효과도 간접적인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국가가 기존에 없던 제도를 신설해 파격적인 예산을 투입하는 게 정당화되려면 저출생 문제 해결이나 첨단 백신 플랫폼 구축과 같은, 투자금이 나중에 2, 3배로 돌아올 정책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