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의회 본회의장을 가득 메운 청중에게 거부권 행사 이유를 설명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가운데). 사진 출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도서관 홈페이지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To give Congress the middle finger.”(의회를 엿 먹이려고)
미국 대통령들은 백악관에서 키우는 반려견에게 독특한 이름을 붙입니다. 가장 정치적인 이름은 제20대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이 키운 ‘비토(veto)’. ‘거부권’이라는 뜻입니다. 전임 대통령이 박력 있게 의회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감명받아 지은 이름입니다. 한 유명 정치학자는 이런 이름을 붙인 가필드 대통령의 속마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욕 대용으로 쓰는 ‘give the middle finger’(셋째 손가락을 주다)는 ‘엿 먹이다’라는 뜻입니다. ‘middle’을 생략해도 됩니다.
마음에 안 드는 법안이 오면 개집에 처박아 주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실제로 가필드 대통령은 취임 후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I might not sign all of the bills Congress passed.”(의회를 통과한 모든 법률안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부권 한 번 행사해 보지도 못하고 취임 6개월 만에 암살된 비운의 대통령입니다.
△“If he approve he shall sign it, but if not he shall return it.”(만약 대통령이 승인하면 서명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낸다)
△“The hard lessons learned by the tragic Watergate experience must result in some positive achievement.”(비극적인 워터게이트 경험으로부터 배운 힘든 교훈은 긍정적인 성과로 귀결돼야 한다)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거부권 기각(overriding veto)’이라고 합니다.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높은 ‘허들’이라 역대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 중 7.1%만이 기각에 성공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정보공개법(FOIA)입니다. 1966년 제정된 FOIA는 원래 정보 공개 범위가 넓지 않고, 공개 조건이 까다로웠습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 후 정부 비밀주의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정보 공개 조건을 대폭 완화한 FOIA 개정안이 의회를 통과해 대통령 앞에 도착했습니다.
포드 대통령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의회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하원에서 371 대 31, 상원에서 65 대 27의 압도적인 표 차로 다시 통과돼 거부권이 기각됐습니다. 당시 기각 표결을 주도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거부권이 기각되려면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I believe the welfare of the Nation, as well as the future welfare of the veterans, wholly justifies my disapproval of this measure.”(나는 국가의 안녕과 참전용사들의 미래 복지가 이 법안에 대한 나의 거부를 온전하게 정당화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는 거부권 행사 이유를 공개적으로 설명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1935년 상하원 합동회의를 소집해 ‘군인 보너스 법안’ 거부 이유를 설명한 것이 시초입니다. 참전용사들에게 이미 많은 보상을 해주고 있고, 보조금 지급이 경기 부양 효과가 없다는 점을 42분에 걸쳐 정부 예산을 열거해 가며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명연설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주 사용하면 ‘독재 대통령’ ‘불통 대통령’의 오명을 쓰기 쉽습니다. 중요한 거부권일수록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절차는 꼭 필요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수많은 거부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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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