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도대체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증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별로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유독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성격에 따라 스트레스를 견디는 수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30대 직장인 강모 씨는 번아웃을 호소하는 후배 A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평소 다른 팀원에게 일을 미루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일찍 퇴근하기 바빴던 그의 입에서 번아웃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오히려 그가 미룬 업무를 수습하기 위해 야근하는 강 씨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강 씨는 “근무 태도로 봐서는 ‘월급 루팡(일 안하고 월급 받아가는 저성과자)’ 같은데 왜 힘들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직장인이 번아웃을 겪는 이유는 대부분 근무 환경에 원인이 있다. 일이 너무 많거나, 상사나 고객에게 시달리거나, 노력에 비해 보수를 못 받는다고 느끼는 상황 등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고, 번아웃으로 이어지기 쉽다.
● 베짱이가 개미보다 번아웃에 약하다?
번아웃은 단순히 일에 지치는 수준 이상의 상태를 의미한다. 번아웃은 △더 이상 업무를 하지 못할 정도의 무기력, 좌절감을 느끼는 정서적 고갈 △업무와 동료들을 향한 냉소적 태도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끼는 성취감 저하 등 크게 3가지 갈래로 나타난다.
과도하게 성실하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이어야 번아웃에 빠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불성실하고 책임감 없는 사람도 번아웃에 빠진다. 번아웃과 성격의 관계를 살펴본 많은 국내외 연구에 따르면 베짱이 같은 사람이 개미처럼 성실한 사람보다 스트레스나 번아웃에 더 약하다.
이스라엘 하이파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어떤 성격이 번아웃에 더 잘 빠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직장인 1105명을 연구했다. 연구진은 이들에게 성격 검사와 번아웃 검사를 실시했다. 성격의 장기적인 영향력을 살펴보기 위해 2년 뒤 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똑같은 검사를 했다.
불성실한 사람은 업무 성과가 낮아 직장에서 높은 경제적 보상을 받기 어렵고, 동료들도 싫어할 수 있기 때문에 업무 스트레스에 취약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반면 책임감과 인내심이 강하고 시간을 잘 활용해 주어진 목표를 잘 이뤄내는 특성을 보인 사람들은 두 차례 모두 번아웃 점수가 낮게 나타났다. 하이파대 연구진은 “성실한 사람은 일을 잘 끝맺고 이를 통해 성취감을 자주 느낄 수 있어 업무 스트레스가 완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번아웃 증상은?
직장에서 정서적으로 지쳐 있다고 느낀다
완전히 지쳐서 퇴근한다
출근할 생각만 하면 피곤하다
일할 때 온종일 긴장된다
맡은 일에 소극적이다
내 일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 잘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직장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성취해도 기쁘지 않다
자료: 직무 소진 척도(MBI-GS)
● 불성실한 학생, 공부에 더 질려직장에서 정서적으로 지쳐 있다고 느낀다
완전히 지쳐서 퇴근한다
출근할 생각만 하면 피곤하다
일할 때 온종일 긴장된다
맡은 일에 소극적이다
내 일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 잘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직장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성취해도 기쁘지 않다
직장에서만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실성이 부족한 학생도 번아웃을 겪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공부 때문에 겪는 번아웃을 뜻하는 학업 소진(消盡)은 불성실한 학생일수록 빠지기 쉽다.
학업 소진도 직장에서 겪는 번아웃과 증상이 비슷하다. 학업 소진에 빠진 학생은 △아침에 학교 갈 생각에 괴로워하고 △공부, 수업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며 △공부가 과연 미래에 도움이 될지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 집으로 돌아온다.
이상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연구진이 중학생 447명을 대상으로 성격과 학업 소진의 관계를 살펴본 연구에 따르면 성실성 점수가 낮은 학생이 학업 소진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불성실한 직원이 직장에서 번아웃을 겪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진은 성실한 학생은 스스로 공부 계획을 세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성취욕이 커서 스트레스를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불성실한 학생은 계획성, 성취욕, 적응력 등이 부족해 공부에 더 큰 부담을 느끼기 쉽다. 그러다 보니 자기 주도적 학습을 어려워하고 공부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 이때 교사나 부모가 시켜 억지로 책상에 앉아 있으면 공부 자체에 질려 학업 소진을 겪는다는 것이다.
공부 계획을 잘 세우지 못하고, 성취욕구가 부족한 학생에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면 학업 소진에 빠질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타인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한 성격인지에 따라서도 스트레스 감당 능력이 다르다. 이탈리아 로마 룸사대 연구진이 번아웃과 성격에 관한 세계 연구 83건을 비교 분석한 결과 이타심, 사교성, 공감 능력 같은 친화성이 부족한 사람은 번아웃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83개 연구 대상은 모두 3만6627명으로 교사, 간호사, 의사, 경찰, 일반 사무직 등 다양한 직군이 포함됐다.
이 연구에 따르면 친화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갈등이 있어도 원만히 잘 해결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 번아웃에 빠질 가능성이 작았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대해 주고, 감정에 잘 공감하며 기꺼이 자기 시간을 내주고 다정하게 행동하는 특징이 있다. 반면 친화성이 부족한 사람은 번아웃에 취약한 것으로 분석됐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따뜻한 사람이 스트레스에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들이 쉽게 지치는 또 다른 이유는 직장 동료들과 잘 지내지 못하니 ‘내 편’이 없어서일 수 있다. 동료애나 소속감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평소 동료들에게 쌀쌀맞거나 무관심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직장에서 마음 둘 곳이 없어 심리적 어려움을 더 겪을 수 있다.
주의할 점은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 일부 연구에서는 친화성이 지나치게 높은 사람도 번아웃에 잘 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감 능력과 배려심이 과도해 다른 사람의 업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다. 자기 능력 이상으로 남을 배려하다가 정작 스스로 지칠 수 있다는 의미다(지난 기사 참고: 싫어도 “네, 네”…나는 왜 거절을 못 할까?).
● ‘유리 멘털’과 완벽주의가 만나면…
성실성과 친화성이 번아웃에 미치는 결과는 양날의 검 같다고 할 수 있다. 적절히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되지만 과하거나 부족할 때 문제가 된다.
번아웃에 한결같이 악영향을 미치는 성격 요인도 있다. 미국 라이트주립대 심리학과 연구진이 성격과 번아웃에 관한 31개 연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정서적 안정성이 부족한 사람은 번아웃에 잘 빠졌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은 걱정이 많고 감정 기복이 크며, 쉽게 우울해하며 짜증을 잘 내고, 죄책감이나 좌절감을 남들보다 자주 강하게 느끼는 특성이 있다. 한마디로 일희일비하는 성격이다.
이들은 같은 상황에서 남보다 더 크게 심리적으로 동요한다. 예민할수록 정서적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 더 피곤하고 열심히 하는 것에 비해 성취감도 떨어져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번아웃으로 연결되기 쉽다.
불안, 우울, 죄책감을 자주 느끼고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성격의 사람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두려워하는 완벽주의 성향까지 가지고 있다면 업무 스트레스에 극도로 취약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반면, 매사에 불안하고 우울함을 잘 느끼는 사람들은 성과를 못 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고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차원에서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쉽다. 스스로 탁월해지기 위한 완벽주의가 아닌, 남의 시선을 의식해 실패를 두려워하는 완벽주의는 자신에게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지난 기사 참고: 지난 기사 “난 무능하다”는 강박, ‘불행한 완벽주의자’ 만든다).
이런 특성은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성격 자체를 바꾸긴 어렵지만, 환경을 변화시켜 성격이 스트레스에 미치는 영향력을 완화할 수 있다. 신 교수는 “조직 구성원 간 갈등이나 직무가 자주 변해 안정감을 해치는 것같이 불안을 유발하는 요소를 조직 차원에서 관리한다면 직원들이 업무 외에 쏟아야 하는 심리적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무의미한 행정업무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도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신 교수는 “개인 차원에서는 자신의 어떤 성격 특성 때문에 회사 일을 힘들어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에 대처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