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과 성격의 상관관계… 완벽주의자만 빠지는 것 아냐 스트레스 받는 수준은 성격에 달려… 업무 버거워하는 ‘베짱이’ 더 취약 성실하면 성과-성취감 높아 덜 지쳐… 친화적-관대하면 원만하게 극복 지나치면 거절 못해 되레 쉽게 소진… 일희일비 많이 할수록 피로 커져
30대 직장인 강모 씨는 같은 팀 후배 A 때문에 스트레스가 크다. A는 다른 팀원에게 도와 달라며 자기 일을 은근슬쩍 떠넘기기 도사다. 남몰래 퇴근해 버려 강 씨가 일을 수습하느라 야근한 적도 있다. 하지만 A는 종종 “퇴사하고 싶다” “번아웃(burnout)이 온 것 같다”고 말한다. 강 씨는 “근무 태도로 봐서는 ‘월급 루팡’ 같은데 왜 힘들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A는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번아웃을 겪는 데는 과다한 업무, 상사나 고객의 괴롭힘, 적은 보수같이 다양한 환경적 원인이 작용한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데 개인차가 있다. 성격이 달라서다. 성격은 세상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틀을 결정하기에 같은 상황을 누군가는 잘 견뎌내지만, 누군가는 유독 힘들어할 수 있다.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는데도 ‘난 왜 이렇게 회사 일에 예민하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힘들어할까?’ 궁금했다면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 ‘월급 루팡’이 웬 번아웃?
이스라엘 하이파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어떤 성격이 번아웃에 더 잘 빠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건강검진 받으러 온 직장인 1105명을 연구했다. 연구진은 이들에게 성격 검사와 번아웃 검사를 실시했다. 성격의 장기적인 영향력을 살펴보기 위해 2년 뒤 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똑같은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는 흥미로웠다. 성격 검사에서 성실성 영역 점수가 낮은 사람, 즉 불성실한 사람들은 두 차례 검사 모두 번아웃 점수가 높았다. 성실성은 매사에 준비성이 있고, 사소한 일도 바로바로 처리하고, 사용한 물건을 잘 정리하고, 정해진 일정을 잘 지키며 맡은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특성을 의미한다.
연구진은 성실성이 부족한 사람은 책임감이나 인내심이 부족하며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해 업무를 버거워한다고 설명했다. 업무를 미뤄서 마감을 지키지 못하거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렵다 느끼면 남에게 떠밀기도 한다. 신강현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불성실한 직원은 일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높은 경제적 보상이나 동료의 지지를 받기도 어렵다”며 “그러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더 크게 느끼고 번아웃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책임감과 인내심이 강하고 시간을 잘 활용해 주어진 목표를 잘 이뤄내는 특성을 보인 사람들은 두 차례 모두 번아웃 점수가 낮게 나타났다. 하이파대 연구진은 “성실한 사람은 일을 잘 끝맺고 이를 통해 성취감을 자주 느낄 수 있어 업무 스트레스가 완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직장에서만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실성이 부족한 학생도 번아웃을 겪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공부 때문에 겪는 번아웃을 뜻하는 학업 소진(消盡)은 불성실한 학생일수록 빠지기 쉽다.
이상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연구진이 중학생 447명을 대상으로 성격과 학업 소진의 관계를 살펴본 연구에 따르면 성실성 점수가 낮은 학생이 학업 소진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불성실한 직원이 직장에서 번아웃을 겪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진은 성실한 학생은 스스로 공부 계획을 세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성취욕이 커서 스트레스를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불성실한 학생은 계획성, 성취욕, 적응력 등이 부족해 공부에 더 큰 부담을 느끼기 쉽다. 그러다 보니 자기 주도적 학습을 어려워하고 공부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 이때 교사나 부모가 시켜 억지로 책상에 앉아 있으면 공부 자체에 질려 학업 소진을 겪는다는 것이다.
● 까칠할수록 스트레스에 취약
타인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한 성격인지에 따라서도 스트레스 감당 능력이 다르다. 이탈리아 로마 룸사대 연구진이 번아웃과 성격에 관한 세계 연구 83건을 비교 분석한 결과 이타심, 사교성, 공감 능력 같은 친화성이 부족한 사람은 번아웃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83개 연구 대상은 모두 3만6627명으로 교사, 간호사, 의사, 경찰, 일반 사무직 등 다양한 직군이 포함됐다.
연구진은 이 두 부류 성격의 핵심적 차이는 관대함과 여유로움에 있다고 봤다.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평소 삶을 대하는 태도가 관대해서 스트레스가 와도 비교적 여유롭게 극복할 수 있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까칠한’ 사람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빡빡하고 관대함이 부족해 스트레스를 이겨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쉽게 지치는 또 다른 이유는 직장 동료들과 잘 지내지 못하니 ‘내 편’이 없어서일 수 있다. 동료애나 소속감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평소 동료들에게 쌀쌀맞거나 무관심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직장에서 마음 둘 곳이 없어 심리적 어려움을 더 겪을 수 있다.
주의할 점은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 일부 연구에서는 친화성이 지나치게 높은 사람도 번아웃에 잘 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감 능력과 배려심이 과도해 다른 사람의 업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다. 자기 능력 이상으로 남을 배려하다가 정작 스스로 지칠 수 있다는 의미다.
● 일희일비하다 지치는 ‘유리 멘털’
성실성과 친화성이 번아웃에 미치는 결과는 양날의 검 같다고 할 수 있다. 적절히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되지만 과하거나 부족할 때 문제가 된다.
번아웃에 한결같이 악영향을 미치는 성격 요인도 있다. 미국 라이트주립대 심리학과 연구진이 성격과 번아웃에 관한 31개 연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정서적 안정성이 부족한 사람은 번아웃에 잘 빠졌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은 걱정이 많고 감정 기복이 크며, 쉽게 우울해하며 짜증을 잘 내고, 죄책감이나 좌절감을 남들보다 자주 강하게 느끼는 특성이 있다. 한마디로 일희일비하는 성격이다.
이들은 같은 상황에서 남보다 더 크게 심리적으로 동요한다. 예민할수록 정서적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 더 피곤하고 열심히 하는 것에 비해 성취감도 떨어져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번아웃으로 연결되기 쉽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악화된다. 성과를 못 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고 지나치게 불안해한다.
이런 특성은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성격 자체를 바꾸긴 어렵지만 환경을 변화시켜 성격이 스트레스에 미치는 영향력을 완화할 수 있다. 신 교수는 “조직 구성원 간 갈등이나 직무가 자주 변해 안정감을 해치는 것 같이 불안을 유발하는 요소를 조직 차원에서 관리한다면 직원들이 업무 외에 쏟아야 하는 심리적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무의미한 행정업무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도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신 교수는 “개인 차원에서는 자신의 어떤 성격 특성 때문에 회사 일을 힘들어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에 대처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