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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권력자의 ‘은폐’, 국민은 더 분노한다

입력 | 2024-06-01 10:00:00


기자와 검찰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들한테 묻는 게 ‘일’이라는 거다. 기자들은 그걸 취재라고 하고 검찰에선 취조라고 한다. 기자들은 상대방의 말을 사실로 믿고 쓰고 검찰은 사실인지 의심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물론 기자도 보도에 앞서 복수의 취재원한테 사실 확인을 하도록 훈련받는다. 기자의 확인 요청에 거짓을 말하는 공직자는 (거의) 없다. 차라리 답변을 피하거나 모른다고 할지언정 거짓말하면 책임을 면치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복(公僕·국가의 심부름꾼)의 도리이고, 알권리를 위해 복무하는 언론에 대한 자세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식이자 원칙이다.

지난해 7월 22일 오전 경북 포항시 남구 해병대 1사단 내 김대식 관에서 엄수된 고 채수근 상병 영결식에서 한 해병대원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채 상병은 집중호우 피해지역인 경북 예천군에서 실종자 수색 중 급류에 휩쓸려 순직했다. 동아일보DB

윤석열 대통령 취임 전후 일을 도왔던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윤 대통령은 남들이 과연 진실을 말하는지 의심한다는 느낌이라고. 평생을 검찰로 살았기에 대통령이 됐다고 단박에 의심증을 벗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남들이 꼭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통령이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거짓을 말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 “순직사고 질책” 못 믿겠다

5월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실 외압 의혹과 대통령이 국방부 수사 결과에 질책했다는 의혹’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윤 대통령은 수사 결과 아닌 ‘순직 사고’에 대해 질책을 했다고 답했다.

“채 일병이 순직한 사고 소식을 듣고 저도 국방장관에게 ‘현장에 며칠 전에 다녀왔지만 어떤 생존자를 구조하는 상황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수습하는 그런 일인데, 왜 이렇게 무리하게 진행을 해서 이런 인명사고가 나게 하느냐. 앞으로 여름이 남아 있고 또 홍수나 태풍이나 이런 것들이 계속 올 수 있는데 앞으로 대민 작전을 하더라도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 이렇게 좀 질책성 당부를 한 바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좋게 말해 동문서답이다.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는 대통령-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통화 사실로 미뤄보면 당시 답변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현장에 며칠 전에 다녀왔지만’이라는 말을 앞세움으로써 2023년 7월 19일 채 상병의 순직일로부터 며칠 지나 질책했음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의도가 엿보인다. ‘격노’ 질문이 나올 줄 알고 뭔가를 은폐하려 치밀하게 계산한 발언이라면, 검찰 앞에 섰던 이들과 닮은 꼴이다.

● 국민은 개돼지가 아니다

순직 그 자체 때문이라면 대통령 주재 국가안보실 회의가 열렸던 7월 31일 즉 대통령 ‘격노설’이 불거진 그날 대통령실-이종섭 통화 말고도 8월 2일, 그러니까 해병대 수사단이 그 사건을 경찰에 이첩한 날, 윤 대통령이 심지어 휴가 중에 개인 폰으로 해외 출장 가 있는 이종섭에게 세 번 씩 전화해 20여 일 전 순직 사고를 또 질책할 리 없다. 그 질책성 전화 사이, 이종섭이 국방장관에서 해임되는 게 아니라 박정훈 수사단장이 보직해임 된 것도 황당하다.

지금까지 대통령(실)과 통화한 적 없다던 이종섭도 어쩔 수 없었는지, 사단장을 빼라는 통화가 없었다는 취지지 통화를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라고 말을 바꿨다. 대통령실 관계자도 “통화내용에 대해 억측을 하고 있다”면서 공수처와 경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이 호주 대사로 임명됐다가 ‘해외 도피’ 논란이 일자 올해 3월 21일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을 통해 귀국하면서 취재진에 둘러싸인 모습. 동아일보DB

국민이 개돼지로 보이는 모양이다. 윤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면 수사 당국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할 텐데 국민들께서 이거는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이 안 된다 하시면 그때는 제가 특검하자고 먼저 주장하겠다”고 말하긴 했다. 안타깝게도 신임 공수처장은 인사 청문회에서 확인했듯 흠 많고, 수사 경험은 전혀 없는 인물이다. 공수처가 기신기신 또는 심기일전 죽기살기로 수사해 “대통령(실)은 무관하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고 치자. 다수 국민이 흔쾌히 믿어줄 수 있을까.

● 비리보다 은폐에 더 분노한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체 왜 대통령은 국민 앞에 거짓을 말한 걸까. 왜 과히 중요하지도 않은 격노의 이유를 굳이 감춘 것일까. 이종섭이 대통령(실)과의 통화를 죽어라 은폐했던 이유는 정녕 무엇이었나.

윤 대통령의 ‘격노 은폐’가 못내 불길한 것은 불행한 우리 역사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우리 국민은 권력비리 그 자체보다 은폐 조작 사실을 더 못 참았고, 더 격노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1987년 1월 19일자 지면.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해 1월 16일 동아일보가 특종 보도한 (책상을) ‘탕’ 치니 ‘억’ 하고 숨졌다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억울한 죽음. 더 큰 국민적 분노는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치사 조작 폭로-19일 ‘박종철 군 사건은 조작됐다’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터져 나왔다. 고문치사 가담자들이 3명 더 있음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도 알고 있었으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신군부 정권에 대한 총체적 공분이 폭발한 것이다. 넥타이 부대의 민주화 시위,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은 깊숙히 감춰져있던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급기야 분출하면서 온 하늘을 삼켜버린, 즉 ‘은폐’에서 비롯된 숙명적 결말이었다.

● 은폐 비서관을 대통령실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국도 비선실세 은폐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때 대통령의 행적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국민에게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청와대 방문 사실을 감추려다 그 숱한 루머가 난무했고, 그럼에도 속수무책이었고, 그래서 일파만파로 일이 커진 게 아닌가 싶다.

당시 ‘문고리 권력 3인방’ 중 일인으로 최근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 심지어 국민공감(!)비서관에 등용된 정호성도 이렇게 말했다. “최순실은 저희한테는 대외적으로 없는 사람이다. 존재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돕는…. 그런 사람이 밖으로 등장하면서 상황이 꼬인 것 같다”고. 2017년 1월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증인 진술에서 한 말이다.

최서원(개명 전 이름 최순실)이 2018년 2월 13일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0년형, 벌금 180억 원을 선고 받은 뒤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동아일보DB

지금은 많이들 잊었지만, 최순실이 세월호 당일 청와대 관저를 방문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2018년 3월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지용)에 따르면 그날 최순실은 청와대 경호검색을 받지 않고 관저까지 들어가 주요 국정 논의 회의(!!)를 문고리 3인방(!!!)과 함께 한 뒤 대통령에게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을 했다는 건의했다는 것이다(이 사실을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에서도 한사코 숨겼다). 그래서 정말이지 납득이 안 되는 바다. 왜 윤 대통령은 하필 탄핵과 비선, 은폐를 연상시키는 정호성을 대통령실에 들인 것인가.

● 분하고 원통해 그냥 넘길 수 없다

‘채 상병 특검법’의 공식 명칭이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다. 채 상병의 불행한 죽음을 규명하는 일은 기실 이렇게까지 온 나라의 에너지를 잡아먹을 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실)의 수사 방해 및 은폐가 의심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작년 8월 13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채 상병 사건 처리 과정에 대통령실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정황과 추측을 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가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감히 입을 놀렸다. 앞에서 누누히 썼듯이 우리 국민은 권력자의 비리 그 자체 못지 않게 비리 은폐에 무섭게 분노한다. 더구나 대통령은 안 갔던 군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들 가진 부모들은 분하고 원통해 도저히 남의 일로 넘길 수 없다. 군 입대를 앞둔 청춘 사이에선 대통령이 무시로 하는 격노가 부글부글 끓어 넘칠 판이다.

지난해 7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된 고(故) 채수근 해병대 1사단 포병대대 상병의 안장식에서 채 상병의 어머니가 아들의 영정 사진을 잡고 오열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차라리 기자의 격노설 질문에 윤 대통령이 이렇게 답했다면 어땠을까. “2022년 개정한 ‘군사법원법’에 따라 군내 사망사건 수사 권한은 민간경찰로 넘어갔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은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사실’에 관한 문제만 조사할 수 있을 뿐 과실에 대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해병대 수사단이었던 박정훈 대령이 사망사건 관련자들과 혐의까지 특정한 이첩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법에 어긋난 월권이었습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바로잡은 것을 수사 개입이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 차라리 상남자답게 말하시라

임성근 전 사단장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진솔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채 상병의 죽음은 정말 비통하지만 사단장이 지휘 책임 아닌 과실치사의 책임까지 져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고 말이다(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이종섭과 통화한 사실과 내용을 진솔하게 밝혀준다면(그리고 앞으론 격노하는 버릇도 고치겠다고 덧붙인다면), 대통령 편에 서겠다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취임 이래 최저인 21% 국정지지율(갤럽)을 먹고도 어퍼컷만 날리는 대통령이 불안하고 불길해 하는 말이다. 불행한 대통령 역사의 반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김순덕 고문·칼럼니스트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