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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몽골기병’ 앞에 무력한 與 [김지현의 정치언락]

입력 | 2024-06-03 14:00:00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앞줄 왼쪽 네 번째)가 당 지도부 의원들과 1일 서울역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정권 규탄 및 해병대원 특검법 관철을 위한 범국민 대회’에 참석해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뉴시스



개원 즉시 몽골 기병 같은 자세로 민생 입법, 개혁 입법 속도전에 나서겠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2대 국회 임기 첫날인 5월 30일 의원총회를 열고 “국정이 더 이상 퇴행하고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국회가 가진 국정 감시 견제 권능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 대표가 언급한 ‘몽골 기병’은 13세기 그 특유의 기동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했던 기마군단입니다. 불과 25년 만에 아프리카 전체 크기와 맞먹는 3100만㎢ 제국을 건설했다 하죠. 로마군이 400년에 걸쳐 차지했던 것보다 더 광활한 면적을 어마어마한 ‘속도전’으로 확보한 겁니다. 당시 몽골의 병력 규모는 10만 명에 불과했다는데, 부대 전원이 보병 없이 기병이었던 데다 병사 개개인이 자기 식량과 장비를 셀프로 싣고 원정에 나섰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합니다. 당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몽골 기병에 대해 “어찌나 신속하게 갈아타는지 조금도 휴식하지 않는다”, “위급상황이 닥치면 불을 피우거나 고기를 먹지 않고 열흘 동안 계속해서 행군했다”고 적기도 했죠.

그야말로 목표를 한 번 설정하면 맹목적으로 앞만 보고 달리는 ‘독한’ 부대인 겁니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22대 국회에서 이런 모습을 추구하겠다는 거고요.

몽골 칭기즈칸의 기마 군대 전술을 재현한 모습. 동아일보 DB

사실 ‘몽골 기병론’의 원조는 민주당 정동영 의원입니다.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창당 직후 의장을 맡은 그는 “몽골 기병이 되어 질풍노도와 같이 누비면서 선거 혁명을 이루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뒤로도 주요 선거 때마다 ‘몽골 기병론’을 내세우며 ‘속전속결’을 강조했습니다. 이재명 대표는 정 의원이 대선에 도전했던 2007년 정 의원의 팬카페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정통)’ 대표였으니 아마 그때 몽골 기병론을 인상 깊게 새긴 듯합니다.

이 대표는 자신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2021년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몽골 기병론’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는 당시 당 선거대책위원회가 제대로 출범도 못 한 점을 언급하며 “몽골 기병대였으면 이미 나와 진격해 점령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박스권에 갇혀있던 자신의 지지율이 ‘매머드급’ 선대위 탓이라고 본 거죠.

그 뒤로 그는 본격적으로 ‘이재명식 몽골 기병론’을 역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충남 논산 시장 연설에서 “민주당의 이재명이 아니라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만들어가겠다”며 “몽골 군인 10만 명이 유럽과 아시아를 휩쓴 힘이 뭐겠느냐. 빠른 속도, 거기에 더해 단결된 힘”이라고 했습니다. 속도감 있게 대대적으로 당 쇄신에 나서겠다는 예고였습니다. 실제 이 발언 직후 당 의원 전원이 이름을 올렸던 선대위를 ‘친명 별동대’ 중심의 슬림한 구조로 개편했고요.


● 대선 후 2년 반 만에 다시 나온 ‘몽골 기병론’
그리고 22대 국회 개원에 발맞춰 2년 반 만에 다시 ‘몽골 기병론’을 꺼내 든 겁니다. 이 대표가 특히 똘똘 뭉쳐 ‘속도전’에 나서라고 주문한 건 ‘국회 원 구성’, 그리고 ‘당론 입법’입니다.

그는 개원 당일 의원총회에서 “총선 민심이 ‘원(院) 구성’에서부터 제대로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국회에선 매번 개원을 앞두고 주요 상임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원내 교섭단체 간 협상이 이어집니다. 대통령실을 피감기관으로 둔 운영위원회와, 본회의 전 마지막 관문인 법제사법위원회를 두고 여야가 치열한 ‘땅따먹기’ 경쟁을 벌이는 시간이죠. 서로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기 때문에 통상 협상은 늦으면 7월 중순까지 이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 질질 끌지 말고 ‘몽골 기병’ 같은 태세로 속전속결로 협상을 끝내라는 게 이 대표의 지시입니다.

이재명 대표가 22대 국회 개원 첫날인 5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첫 의원총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가 6월 2일 오전 국회에서 22대 국회 원 구성 관련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민의힘이 시간만 허비하면 민주당이 18개 상임위를 모두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뉴스1

박찬대 원내대표가 일요일인 6월 2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민의힘은 시간만 끌고 있는데, 민주당은 마냥 기다릴 수 없다”며 “국민의힘이 시간만 허비한다면 표결을 통해 민주당이 18개 상임위를 다 가져올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배경이죠.

민주당이 언제부터 그렇게 국회법을 잘 지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국회법에서 정한 원 구성 법정시한인 6월 7일까지 국민의힘과 협상이 되지 않을 경우 18개 상임위를 모두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범야권은 22대 국회에서 이미 192석을 확보했다. 솔직히 여당 없이도 국회 운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상임위별로 야당 의원 숫자가 이미 개의 정족수인 과반을 넘기 때문에 국민의힘 의원들이 없어도 물리적으로 전혀 상관 없다는 겁니다.

그러자 국민의힘은 이날 오후에야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럴 거면) 여야 간 협상은 왜 하나. 그냥 원 구성 시한에 맞춰서 민주당 마음대로 결정하지, 왜 협상하자는 건가”라며 “우리에게 민주당의 들러리가 돼 달라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더군요. 참으로 무력하게 들립니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민주당에서 반드시 법사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면 국민의힘이 국회의장직을 맡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던데 이건 또 무슨 뒷북 화법인가 싶습니다.


● ‘몽골 기병대’ VS ‘웰빙 정당’
민주당은 이 대표가 주문한 ‘입법 속도전’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개원 전인 5월 22, 23일 일찌감치 당선인 워크숍을 열고 22대 국회 개원 즉시 ‘채 상병 특검법’과 이 대표의 총선 공약이었던 전 국민 25만 원 민생 회복지원금을 발의하기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30일 개원 직후 두 법안을 당론 1호 법안으로 발의했고요. 역시 개원 전 워크숍을 끝낸 조국혁신당도 이날 예고했던대로 ‘한동훈 특검법’을 전체 의원 명의로 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원내정책수석부대표(오른쪽)와 민병덕 정책위 수석부의장이 개원 첫 날인 5월 30일 국회 의안과에 당론 1호 법안인 ‘해병대원 특검법’과 국민 1인당 25만 원 민생 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민생위기 특별조치법‘을 접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조국혁신당 박은정(오른쪽), 차규근 의원이 22대 국회 임기 시작일인 5월 30일 오전 국회 의안과에 1호 법안으로 ‘한동훈 특검 법안’을 제출하고 있다. 뉴스1

국민의힘은 이날까지 당론 법안을 정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날에야 1박 2일 워크숍을 떠났거든요. 상대적으로 굉장히 한가해 보입니다. 역시 ‘웰빙 정당’답습니다.

충남 천안에서 열린 워크숍 만찬에는 윤석열 대통령도 참석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오늘 저녁은 (테이블에) ‘맥주도 놓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제가 욕 좀 먹겠다”며 “제가 테이블마다 다니면서 여러분들에게 맥주로 축하주 한 잔씩 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총선 참패에 대한 반성이나 지지율 하락에 대한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더군요.

윤석열 대통령이 5월 30일 오후 충남 천안시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제22대 국민의힘 국회의원 워크숍’ 만찬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이 5월 30일 저녁 충남 천안시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제22대 국민의힘 국회의원 워크숍’ 만찬 행사를 마치고 나오며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심지어 윤 대통령은 행사를 마치고 나오면서는 기분이 좋았는지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도 해보였죠. 이날은 훈련 중 사망한 육군 훈련병의 영결식이 있던 날입니다. 이재명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페이스북에 “진정한 보수라면 이럴 수 있나”라고 썼고,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도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어제 세상에서 가장 비싼 맥주 한잔을 들이키신 것”이라고 맹비난했습니다. 조국 대표도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윤 대통령의 어퍼컷을 언급하며 “이날이 어떤 날인지 아냐”고 따져 물었고요. 정말 스스로 매를 번다는 표현이 딱입니다.

다음날에야 국민의힘이 뒤늦게 내놓은 당론 법안은 무려 5개 분야 31개였습니다. 내용도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부터 금융투자소득세 폐지까지를 총망라했더군요. 이를 두고 한 민주당 보좌진은 “솔직히 지금 국민의힘은 법안 하나 통과시키기도 쉽지 않은 구조인데, 저렇게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것 자체가 무책임한 것”이라며 “여당으로서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국정과제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전혀 안 돼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행태”라고 꼬집더군요.

이 말마따나 22대 국회에서 국민의힘이 앞으로 기댈 수 있는 건 국민 여론 뿐인데, 지금같이 해서는 여론의 ‘백업’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브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최근 번역돼 나온 신간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패배를 인정해야 재집권도 가능하다고 분석했던데, 국민의힘은 여전히 강서구청장 선거부터 이번 총선까지 연패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합니다.

몽골 기병은 기동력뿐 아니라 잔인성으로도 유명합니다. ‘삼국유사’ 속 황룡사 탑을 불태웠던 몽골 기병의 공격은 그야말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이었다고 표현돼 있죠. 대놓고 몽골 기병처럼 싸우겠다는 거야(巨野)의 총공세 앞에서 여당이 너무 무기력한 건 아닌지, 과연 싸움이 되긴 할 지 우려스럽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