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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에이스→프로 골퍼 변신 윤석민 “목표 있는 인생은 행복”[이헌재의 인생홈런]

입력 | 2024-06-03 12:00:00


프로 골퍼가 된 윤석민(왼쪽)이 한국 남자 골프의 레전드 최경주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2011년 12월 경기도 한 골프장에서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 투수들 간의 세기의 골프 대결이 펼쳐졌다. 국가대표 오른손 에이스 윤석민(38·당시 KIA)과 ‘괴물 투수’ 류현진(37·한화)이 골프로 맞붙은 것이다. 당시 구력이 1년 정도였던 윤석민은 80대 후반의 평균 스코어를 치고 있었다. 반면 류현진은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초보였다. 이게 겨우 100타를 깬 수준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류현진의 판정승이었다. 윤석민은 자기 타수에 맞게 89타를 쳤는데 류현진이 라이프 베스트(라베)인 88타를 기록한 것이다. 드라이버와 아이언샷에서는 윤석민이 월등히 앞섰다. 하지만 손 감각이 탁월한 류현진은 퍼팅에 강했다.


올해 4월 KPGA 프로 선발전을 통과한 윤석민이 자신을 도와준 최충만 프로와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윤석민 인스타그램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현재 류현진은 여전히 한화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2013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해 지난해까지 11시즌 동안 78승 48패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한 류현진은 올 시즌을 앞두고 친정팀 한화로 복귀했다.

윤석민의 인생은 더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2019년 KIA에서 은퇴한 그는 올해 4월 열린 2024 제1차 KPGA 프로 선발전을 통과해 ‘프로 골퍼’가 됐다.

절친한 선후배 사이인 둘은 요즘도 가끔 동반 라운드를 한다. 골프 실력 차이는 이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벌어졌지만 내기에서는 여전히 류현진이 강하다고 한다. 윤석민은 “이상하게 (류)현진이랑만 치면 꼬이는 것 같다. 반면 현진이가 나랑만 치면 자기 실력 이상을 발휘한다”며 웃었다.


윤석민이 지난 달 SK텔레콤 채리티 오픈에서 아이언샷을 하고 있다. KPGA 제공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윤석민은 류현진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활약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9전 전승 우승에 큰 역할을 했고, 2011년 KIA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해 그는 다승(17승), 평균자책점(2.45), 탈삼진(178개) 등에서 모두 1위에 오르며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구 선수 생활의 끝이 다소 아쉬웠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가 돌아온 2015년 30세이브를 거두며 부활했지만 이후 어깨 부상이 심해지며 추락을 거듭했다. 2018년에는 승리 없이 8패 11세이브페 평균자책점 6.75로 부진했고, 이듬해 유니폼을 벗었다.

33살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한 후 그는 엄청난 좌절감과 상실감에 빠졌다. TV를 통해 동료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다.

밤에 잠들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매일 소주 1, 2병을 먹어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는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을 했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고, 사람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한국 야구의 에이스로 활약하던 시절의 윤석민의 모습. 윤석민은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의 주역이다. 동아일보 DB


방황하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골프였다. 폐인처럼 지내는 그를 안타깝게 여긴 한 지인이 그를 필드로 불러냈다. 동반자들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그들은 모두 골프에 진심이 사람들이었다. 의사와 사업 등을 하는 이들은 생업을 하는 틈틈이 시니어 프로 골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첫 라운드에서 그는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일파만파(첫 홀을 모두 파로 적어주는 것)’도 없었고, 멀리건도 없었고, 컨시드도 없었다. 모든 스코어를 골프 규칙에 따라 엄격히 적어야 했다. 스트레스를 풀러 나왔던 그는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의 정체는 실로 오랜만에 느껴본 ‘승부욕’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하루하루를 골프로 불태우기 시작했다. 뭔가 집중할 게 생기자 잡념도 사라졌다. 그렇게 1년을 지내고 나자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주변에서는 그에게 프로 도전을 권했다.

프로의 벽은 높았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그는 6차례나 프로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연속된 낙방이었다. 6번의 도전 중 5번은 예선 탈락이었다. 2022년 가을 테스트 때 딱 한 번 본선에 올랐지만 역시 통과는 하지 못했다. 윤석민은 “대회장에 가면 마운드서 섰을 때처럼 설레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매번 탈락했지만 너무 신나고 재미있었다”며 “프로 도전을 하면서 많은 프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골프 유튜브도 운영하면서 소중한 원 포인트 레슨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KIA 에이스로 활약하던 시절의 윤석민. 150km대 중반의 빠른 공과 다양한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동아일보 DB


지난해엔 프로 테스트에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처음 프로에 도전할 때 3년만 도전해 보자고 마음먹었고, 6번의 도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그는 한 야구 프로그램의 해설위원으로, 또 예능인으로 방송 출연 등을 하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두 아이의 아빠 노릇도 했다.

그러다 올해 4월 뜻밖의 기회가 왔다. 1~3월 슬럼프를 보낸 그는 샷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4월 마침 시간이 비어 프로 테스트에 응했다.

경기가 열린 날은 비가 왔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이런 환경이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됐다. 야구 선수 시절부터 그는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는 데 능했다. 다른 선수들이 허둥거리는 동안 그는 바뀐 환경에 맞게 낮은 탄도 샷과 슬라이스 샷 등을 구사했다. 그날 그는 ‘6전 7기’ 끝에 공동 20위로 합격했다. 윤석민은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다.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목표를 이룬다는 건 정말 뜻깊은 일”이라며 “야구에서 은퇴한 후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골프를 통해 새 목표를 찾을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게 너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석민이 지난달 SK텔레콤 채리티 오픈에서 한 조를 이룬 김한별 프로와 경기를 하고 있다. KPGA 제공


지난달 KPGA SK텔레콤 채리티 오픈에서 그는 한국 남자 골프의 레전드인 최경주(54)와 만났다. 최경주는 “야구 선수 출신이 뒤늦게 골프 프로가 됐다니 정말 대단하다. 이왕 이 길로 들어선 김에 1부에서 뛸 수 있는 투어 프로(정회원)까지 도전해 보라”고 덕담을 건넸다.

하지만 윤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하루종일 골프에만 매달려도 투어 프로 되는 게 쉽지 않다. 지금처럼 방송 활동 등 생업을 하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당분간은 야구와 골프 등을 넘나들며 다양하게 활동하고 싶다. 그리고 향후 다시 목표를 잡아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2021년과 2022년에 아마추어 신분으로 출전했던 두 차례의 KPGA 투어에서 모두 컷 탈락했다. 2부 투어인 KPGA 챌린지투어 예선에도 7회 출전해 모두 탈락했다.

이제 이름 앞에 ‘프로’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윤석민에게 야구는 여전히 마음의 고향이다. 그는 지금도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종종 팬들과 만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모처럼 마운드에 올라 직접 공을 던지기도 했다. 은퇴 후 한참 몸이 망가졌을 때 시속 100km의 공도 제대로 던지지 못했던 그는 골프 등을 통해 회복된 몸으로 최고 시속 136km의 공을 뿌리며 여전한 클래스를 과시했다. 그는 “두 아들이 야구보다는 축구를 더 좋아한다”며 “선수 생활을 할 땐 아이들이 어려서 내가 야구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려 정말 이를 악물어 던져봤다”며 웃었다.


윤석민(오른쪽)은 야구 해설위원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윤석민은 KIA 시절 룰메이트였던 두산 홍건희와 포즈를 취했다. 윤석민 인스타그램


오랫동안 건강하게 활동하기 위해 그는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가능한 한 소식하려고 하고 틈나는 대로 많이 걸으려 한다. 한 번 산책을 나가면 최소 1시간 이상은 걷는다.

야구와 골프의 매력에 대해 묻자 그는 “두 종목 모두 끝이 없는 게 매력”라고 답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기에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야구를 잘했던 선수도 한순간 삐끗하면 2군에 내려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골프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됐다’ 싶다가도 내일 안 되는 게 골프다. 우리네 인생처럼 야구도 골프도 항상 무너지지 않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근 사회인 야구 경기에서 시속 136km의 강속구를 던지며 건재를 과시한 윤석민. 그날 경기 MVP로도 뽑혔다. 윤석민 인스타그램


그는 주말 골퍼들에게도 ‘꾸준함’을 강조했다. 윤석민 ‘프로’는 “많은 아마추어 분들이 한두 번 레슨을 받고 일주일 정도 연습하면 뭔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며 “그래서는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 배운 걸 한 달이던 두 달이던 시간을 들여 꾸준히 몸에 익혀야 한다. 뭐든지 쉽게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