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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의 무비홀릭]행복한 퓨리오사

입력 | 2024-06-03 22:25:00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여전사 퓨리오사는 고통과 분노를 느끼지만 두려움의 감정을 모른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제가 남자인데, 사랑도 없이 여자를 안는다는 게 죄스럽다고 느껴졌습니다.”

2021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각본상)을 받은 홍상수 감독 ‘인트로덕션’의 한 장면이에요. 배우로 활동하던 젊은이가 연기를 그만두었어요. 여자친구가 있는 자신이 연기를 한답시고 외간 여자를 안고 키스하는 가짜 행위는 연기할 수 없다면서 말이에요. 마케팅 효과를 내려고 남녀 배우의 없는 스캔들도 만들어 내는 시대에 참 순진해 빠진 소리라는 생각마저 들지요? 아니나 다를까. 이 얘길 들은 극 중 유명 배우(기주봉)는 뿔이 나 고함쳐요. “뭐가 죄스러워? 남자가 여자를 안는 건 다 사랑이야!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건데!”

홍상수다운 명대사가 아닐 수 없어요. ‘부비부비’에 무슨 가짜가 있느냔 거죠. 이 영화는 홍상수 예술세계의 변치 않는 핵심 질문이 관통하고 있어요. ‘진짜란 무엇인가’란 질문이지요.

가장 솔직한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 빼고는 세상에 진짜는 하나도 없다고 믿는 예술가가 홍상수예요. real(진짜의) 혹은 realistic(사실적인) 같은 수식어들도 전부 다 실제론 가짜인데 진짜를 가장하는 위선적 존재들에 붙이는 용어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홍상수 영화에선 진정성, 진실 같은 근사하고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취급돼요. 실제론 풋풋한 여자 꾀어서 자고 싶은 솔직한 욕망을 감춘 채 “사막처럼 피폐해진 너의 영혼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다 ‘천지창조’를 그릴 때와 같은 절실하고 창조적인 나의 손끝으로 어루만져 줄게” 같은 개소리를 하면서 모텔로 데려가려는 먹물 수컷들이야말로 위선, 즉 가짜란 얘기죠. 하긴 그래요. 부의금 내라면서 우리가 받는 톡은 “돈 10만 원 이상 송금할 은행 계좌번호” 같은 솔직한 문장이 아니라 “마음 전하실 곳”이라는 시적 표현이잖아요?

이런 맥락에서 79세 조지 밀러 감독의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야말로 본능적이어서 가장 솔직한 인간을 보여줘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년)의 프리퀄인 이 영화는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한정된 물과 기름을 차지하려 죽고 죽이는 인류의 야만적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여전사 퓨리오사의 탄생기예요. 악당들에 의해 수갑에 왼 손목이 채워져 옴짝달싹 못 하는 퓨리오사가 왼팔을 뚝 끊어내고 자유를 찾아 질주하는 장면은 짐짓 충격적이에요. 하지만 영화는 대롱대롱 매달려 남아 있는 그녀의 왼팔을 마치 도마뱀이 끊어낸 꼬리처럼 천연덕스러운 느낌으로 묘사하지요. 문명 없는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의 고통만을 느낄 뿐 닥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결코 품진 않는다는 것이 조지 밀러의 생각이니까요.

흥미롭고 놀라운 포인트는, 이 영화 속에서 “나를 기억해줘” 하고 동물처럼 꽥꽥거리며 죽어가는 인간들의 표정이 희열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요. 두려움은 문명의 산물일지 몰라요. 생각해 보세요. 배추흰나비가 의대 가서 연봉 3억 원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겠어요? 양재천변에 말라 죽은 지렁이가 과연 ‘브라질너트 먹고 장수해야 하는데…’ 걱정하다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겠어요? 두려움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에요. 문명사회에서 교육의 본질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꿈과 희망을 구성원들에게 주입시키고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무치도록 만듦으로써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도구일지도 몰라요. 평생 단 한 번 찾아올 죽음을 수십 년 매일매일 걱정하면서 똥줄이 타는 우리야말로 문명사회의 노예는 아닐까, 매드맥스에서 죽음을 친구 삼아 사는 미친 인간들이야말로 희망을 교육받지 않았기에 정녕 해피한 존재는 아닐까 말이에요.

아, 그렇다고 해서 아무 데나 똥 싸고 주먹 휘두르는 게 진짜 삶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에요. 윌럼 더포 주연 ‘고립된 남자(Inside·2023년)’에는 인간의 원초적 최종적 본능이 ‘예술’일지도 모른다는 탁월한 질문이 담겼어요. 고가 예술품을 훔치는 남자가 마천루 펜트하우스에 명화를 훔치러 들어가요. 경보 시스템이 오작동하면서 갇히게 된 남자는 수십 일간 돌아오지 않는 집주인을 기다리며 굶어 죽어 가요. 결국엔 저 높은 천장 유리를 뚫고 탈출하려는 마지막 계획을 세운 남자. 매일매일 가구와 집기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천장을 향해 1m씩 올라가는데, 이렇게 점차 완성되어 가는 구조물이 남자가 훔치려는 40억 원짜리 그림보다 훨씬 아름다운 설치미술로 완성된다니 말이에요!

인간의 진짜 본능은 번식일까요, 아니면 알타미라 동굴벽화 같은 예술일까요? 번식 단계의 자리돔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머리를 뒤로 젖혀 세상 아름다운 춤을 추는 것처럼, 예술을 만들어내는 건 인간의 성욕이 아닐까 하는 융합적 사고도 해봅니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