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전미총기협회(NRA) 연례 총회에서 연설한 뒤 지지자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댈러스=AP 뉴시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최근까지 우리 외교안보 당국자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한미동맹은 공고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올해 11월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집권하더라도 한미관계는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도 있다. 70여 년을 이어온 혈맹 간 자유주의 연대와 신뢰가 쉽사리 무너질 리 만무하다는 기대가 깔린 듯하다. 하지만 갈수록 들려오는 얘기가 심상치 않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트럼프 1기 정부에서 외교안보 요직을 지낸 인사들의 발언은 한층 사납고 거칠어질 ‘트럼프 시즌2’를 예고하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의 대대적인 재편 가능성이다. 트럼프 진영 인사들은 한결같이 더는 주한미군이 필요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정부가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증액을 거부하면 주한미군은 감축하거나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 1기 때와 판박이 논리다. 트럼프가 다시 집권할 경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거론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미 국방부 부차관보는 지난달 한 인터뷰에서 주한미군을 더 이상 한반도에 ‘인질’로 붙잡아둬선 안 된다고까지 했다. 한국이 대북 방어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주한미군은 중국 억제로 역할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바이든 정권에서 간신히 복원된 동맹 관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보다 비상한 각오로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한 세심한 안보 전략을 강구해야 하는 시점이다. 무엇보다 트럼프 1기 시절 동맹 파열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트럼프 1기 시절 우리 정부는 미국의 방위비 증액 공세에 내내 끌려다녔다. 미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등 미군 수뇌부까지 돈을 더 내라고 우리 군 지휘부를 면전에서 압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군 고위 관계자는 “동맹은 온데간데없고, 거의 안면몰수 수준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뼛속까지 사업가이자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트럼프는 대통령에 재선되면 더 노골적으로 ‘동맹 청구서’를 들이밀 것이다. 우리로선 방위비 분담금이 ‘매몰 비용’이 아닌 최적의 외교안보 투자라는 점을 각인시키는 전략적 노력을 지금부터 경주해야 한다.
주한미군은 대북 방어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통한 역내 안보전략의 ‘린치핀(linchpin·핵심축)’임을 확실히 주지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주한미군을 ‘협상 칩’으로 한국을 압박해 얻어낸 방위비 증액분보다 그로 인해 초래될 미국의 전략적 손실이 훨씬 크다는 점도 적극 설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태가 빚어지면 중국 등 주변국이 반발하겠지만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가용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 국민을 보호하고 영토를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최우선 책무이지 결코 주변국 눈치를 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핵무장과 미사일 무더기 도발 및 정찰위성 발사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시로 위반하는 북한의 도발을 눈감아주는 두 나라가 임계점을 넘은 북핵 위협에 맞서 한국의 자구 노력에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신냉전 기류가 현실화하고 트럼프 시즌2가 현실화되고, 이로 인한 동맹 균열로 자유진영이 지리멸렬하게 되면 북-중-러 3국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뒷배 삼아 더 대담한 도발과 함께 트럼프 2기 정부와 핵동결을 대가로 주한미군 철수와 대북제재 완화를 받아내는 거래를 시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한층 격렬해질 미중 패권전쟁 등 국제정세의 소용돌이와 북한의 파상 공세에 한국이 속절없이 휩쓸리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사태를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국가안보 역량을 갖추는 데 이념과 진영을 떠나 머리를 맞대야 할 시점이다. 안보 국익을 극대화하고, 외교적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자강(自強)의 노력부터 경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