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해방구’ 발길 잦아진 중국인들
김철중 베이징 특파원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중국 베이징의 주중 한국문화원 1층에 마련한 ‘SEE K’ 전시관(위쪽 사진). 1일 한국문화원 공연장에서 한국의 ‘오뮤(OUBA MUSIC)’ 팀이 노래 공연을 하고 있다. 이날 공연장에는 200명이 넘는 중국인 관객들이 찾아왔다. 베이징=김철중 특파원 tnf@donga.com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과 리창(李强) 중국 총리의 회담에서 양국이 문화 분야를 포함한 2단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재개에 합의한 뒤, 최근 중국에서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이 사라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발한 중국 측이 2017년 조치를 내린 뒤 코로나19까지 겹치며 한한령이 8년 가까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 중국 관계자는 “베이징 중심가에서 열린 한국 공연에 중국인들이 이처럼 많은 관심을 보이는 건 양국 문화교류 재개의 기대감을 높여준다”고 말했다.
●韓 대중가수 공연에 연신 환호성
해외 한국문화원들은 어디나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지만, 주중 한국문화원의 입장은 남다르다. 한한령이 내려진 뒤 중국은 여전히 한국 가수의 공연이나 영화 상영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한한령이 법에 명시되진 않았으나 기획사에서 중국 지방정부에 한국 가수 공연의 승인을 요청하면 여러 이유를 대며 허가를 내주지 않는 식이다. 외교 공관으로 여겨지는 주중 한국문화원은 사실상 중국인들이 자유롭게 한류를 즐기는 유일한 해방구다.
이날 공연은 주중 한국문화원의 ‘문화가 있는 날’ 행사 중 하나다. 올해 13개 팀을 선정했는데, 공모 당시 110여 개 팀이 신청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문화원 관계자는 “과거에는 주로 국악이나 전통문화 공연 위주였지만 이번에는 대중음악, 재즈, 비보이 댄스 등으로 장르를 다양화했다”고 설명했다.
무대에 오른 오뮤 팀은 주로 중국 가요를 한국어로 번안해 부른다. 유튜브 등에서 주로 활동하는데 중국 소셜미디어 플랫폼 ‘더우인(틱톡)’ 구독자만 45만 명일 정도로 중국 내 인지도가 상당하다. 공연을 본 중국인 관객들은 “중국 노래를 한국어로 불러주니 더 감미롭다” “한중 문화 교류의 상징 같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에서 주로 버스킹 공연을 해온 오뮤는 3년여 만인 올 1월 대만에서 길거리 공연을 했다. 이들은 “비록 실내 공연이지만 베이징에서 노래한 게 꿈만 같다”며 “곧 중국 길거리 공연을 할 날도 오지 않겠냐”라고 소감을 밝혔다.
●매달 3500명 넘게 찾는 K컬처 전시관
특히 아이돌 그룹별로 설치된 메시지 벽에는 중국 팬들이 찾아와 남긴 메모가 가득했다. 한한령 이후 중국 공연이 막혔고, 최근 중국 내 반한 감정이 상당한데도 시들지 않은 K팝 인기를 실감케 했다. 5월 칭다오에서 열린 ‘K팝 페스티벌’에는 중국 K팝 커버댄스팀 26팀이 참가하며 성황을 이뤘다.
K팝 외에도 한류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은 여전하다. 전시관에는 한국 게임이나 웹툰, 캐릭터 소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현장에 진열된 한국 애니메이션 캐릭터 ‘잔망루피’는 중국의 주요 생활용품 매장들에서도 별도 코너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현장 직원은 “진열된 상품을 사고 싶다는 방문객이 많아 상품마다 해당 업체로 연결되는 QR코드를 만들어놨다”고 말했다.
3일 중국 베이징 주중 한국문화원 1층 ‘SEE K’ 전시관을 찾아온 중국인 방문객들이 한국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대형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베이징=김철중 특파원 tnf@donga.com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해 7월 다시 문을 연 이곳은 매달 평균 3500명이 방문할 정도다. K팝에 열광하는 젊은이들만 찾아오는 게 아니다. 주말이면 중국 학교나 회사에서 수십 명씩 단체로 몰려 온다. 중국 어린이날인 1일 전후로는 유치원생 등도 많이 찾아왔고, 최근엔 중국 지방정부 공무원들이 단체 관람을 오기도 했다.
한국 콘텐츠에 대한 중국의 태도 변화는 이미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는 지난달 3일 베이징 국가대극원 콘서트홀에서 공연했다. 2017년 2월 중국 공연이 취소된 지 8년 만에 다시 중국 무대에서 선 것이다. 한국의 유명 재즈 아티스트인 마리아 킴도 올해 초 중국에서 소규모 투어를 진행했다.
상대적으로 한한령 벽이 더 높았던 대중음악에서도 희소식이 들렸다. 중국 정부가 한국 인디밴드 ‘세이수미’의 다음 달 12일 베이징 공연을 허가했다. 정재호 주중대사도 “클래식에 이어 한국 대중가수의 중국 내 단독 공연이 허가된 것은 이례적”이라며 “지속적으로 관련 사안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동안 중국에서 한국 문화를 알리는 창구 역할을 해 온 주중 한국문화원도 이런 분위기가 반갑다. 김진곤 원장은 “문화원 행사 때마다 한류 콘텐츠에 대한 중국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체감해왔다”며 “2025년과 2026년이 한중일 3국 문화교류의 해로 지정된 만큼 한류 콘텐츠의 중국 진출이 자연스럽게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당장 유명 K팝 아이돌 그룹의 중국 공연이 성사되는 등 ‘전면 개방’은 쉽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3연임을 공식화한 뒤 중국은 지속적으로 내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애국주의 성향도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해외 스타에 열광하는 모습은 오히려 또 다른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중국 공연업계 관계자는 “중국에는 공통분모가 많은 한국 문화를 서양 문물보다 더 위협적으로 여기는 시각이 존재한다”며 “이전처럼 자유로운 문화 교류는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철중 베이징 특파원 tn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