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여소야대로 정부 정책 주도권 실종 공무원 ‘5년 단임 대통령’ 부정여론 커져 李 대표의 연금 합의 제안 거부는 실수 野 거부할 수 없는 정책 명분 세워야
박중현 논설위원
한국에서 ‘5년 단임 대통령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가장 높은 직업군을 꼽는다면 단연 정부 중앙부처 공무원들일 것이다. 미국식 4년 중임 대통령제든, 영국식 내각책임제든 현재의 단임 대통령제에서 탈피해 대통령과 국회의 임기를 맞추지 않으면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는 공무원들이 많다.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이 따로 노는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질 때마다 시급한 국가 현안이 정쟁에 휩쓸려 산으로 가는 걸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21대 국회가 문 닫기 직전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여당이 주장한) 소득대체율 44%를 받겠다. 이번 국회에서 합의 처리하자”고 했다. 여야 국민연금 개혁안의 소득대체율 차이가 1%포인트로 좁혀지자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예상 못 한 파격 카드를 던졌다. 당시 김진표 국회의장도 “원 포인트 본회의라도 열어 처리하자”고 거들었다.
여당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채 상병 특검법’ 등과 연금개혁을 뒤섞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드는 ‘정략적 꼼수’라며 반발했다. 대통령실 역시 “22대 국회로 넘겨 논의하자”며 발을 뺐다. 이 대표도 예상했을 반응이다. 합의되지 않아도 대결 대신 양보, 타협을 선택하는 지도자 이미지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차기 대통령 자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상황에서 다음 정부의 숙제로 넘어갈 경우 지지층의 반발까지 부를 수 있는 연금개혁을 선심 써가며 부담 없이 털어낼 좋은 기회라는 판단이다.
이런 생각을 한 공무원들이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등 모수(母數)개혁과 구조개혁의 병행을 주장하며 반대한 여당이나 대통령실보다 덜 개혁적이라고 할 수 없다. 108석으로 쪼그라든 여당을 배경으로 거대 야당과 협상해야 하는 윤 대통령이 임기 내에 더 나은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연금개혁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입 밖에 내놓은 적조차 없다.
이달 들어 윤 대통령은 정책에 대한 열의가 더 강해진 모습이다. 머뭇거리다간 정책 주도권을 야당에 완전히 뺏길 수 있다는 초조함이 묻어난다. 총선 직전 다급하게 진행한 24차례 민생토론회를 고려할 때 지지율 21%, 부정 평가 70%란 성적표를 받아든 지금은 정책 몰아치기가 더 가속화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국내외 선례를 봐도 국가수장 개인이나 가족 문제로 지지율이 폭락한 정부가 정책으로 점수를 만회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개헌, 탄핵만 빼고 뭐든 원하는 건 밀어붙일 수 있는 거대 야당을 상대하면서는 더 어렵다. 아무리 대통령이 기강을 강조한다 해도 국회만 가면 판판이 정책이 무산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무기력증, 복지부동은 더 심해질 것이다.
대통령이 걷어찬 ‘연금개혁 합의 제안’에 탈출의 실마리가 있다. 차기 정권을 노리는 이 대표, 민주당이 이득이 된다고 생각할 제안을 내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부동산 정책에 관한 한 민주당은 트라우마가 있다. 1기 신도시 재건축을 비롯한 현 정부의 주택 공급 확대 정책에 무작정 반대하다가, 혹시 차기에 권력을 잡았을 때 ‘부동산 악몽’을 다시 겪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실거주 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완화 주장이 민주당에서 먼저 제기된 건 수도권 중산층 공략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준위 방폐장 특별법 처리 등 장기 과제는 현 정부 내에 풀지 못하면 차기 정부가 독박을 써야 할 난제다.
이 대표를 윤 대통령보다 더 ‘대통령스럽게’ 보이도록 만든 연금개혁 합의 거절은 실수였다. 거부권을 행사할 법안과 따로 떼어 대응했어야 했다. 불리한 정치구도 속에서 정부가 정책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면 야권이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세우고, 면밀한 실행 전략을 통해 성공 사례를 쌓는 게 중요하다. 이런 때 일방적 정책 홍보에 치중한 민생토론회를 계속 열자고 주장하는 공무원은 대통령의 ‘격노’에 민감한 아첨꾼일 가능성이 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성과가 나는 것’이란 정책에 대한 인식을 대통령부터 바꾸지 못하면 5년 단임 대통령, 여소야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공무원만 더 늘어나게 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