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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입력 | 2024-06-05 22:25:00

임오군란은 부당한 급료 지급과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다. 일본군 교관이 별기군을 훈련시키는 모습. 동아일보DB

이문영 역사작가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보통 문제가 아닌 사건이었다. 군인들의 거사였다. 군인들에게 급료가 미지급된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급료가 무려 13개월이나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멀쩡한 나라라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군란 발생 나흘 전, 한 달 치 급료를 쌀로 지급한다고 하여 군인들이 선혜청에 모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지급된 쌀은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양도 적었다. 군인들은 급료 수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선혜청 관리들이 무조건 받아 가라고 윽박지르는 통에 열 받은 군인들이 관리들을 두들겨 팼다. 선혜청의 책임자는 민씨 척족의 우두머리인 민겸호였다. 민겸호는 선혜청에서 일어난 소요를 듣고는 앞장선 군인 네 명을 체포했다. 쌀 지급의 문제를 돌아볼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다. 군인들의 불만은 하늘로 치솟았다.

여기에다 민겸호가 체포된 군인들을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에 놀란 가족들은 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모았고 9일 아침에 종묘 옆에 있는 동별영에 모여 탄원서를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무위대장 이경하나 선혜청 당상 민겸호 모두 이것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말로 할 길이 막히니 이젠 주먹이 나올 차례였다.

“굶어 죽으나 법에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죽일 놈을 죽여서 이 분함을 풀자!”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민겸호는 재빨리 달아나 찾을 수가 없었지만, 민겸호 집 안을 뒤져 온갖 재화를 털어서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비단, 녹용, 사향 등이 모두 불탔다. 누구도 물건 한 점을 훔치지 않았다.

그동안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도 군인들에게 합류했다. 조직이 갖춰졌다. 제1대는 포도청을 습격해 동료를 구출한 뒤에 민태호 등 민씨 척족의 집을 습격했다. 제2대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공격해 일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를 살해했다. 제3대는 경기감영을 습격해 무장을 강화했다. 제4대는 명성황후가 다니던 절과 무당집 등을 불태웠다.

다음 날이 되자 더욱 커진 무리는 민씨 척족과 가까웠던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의 형)을 살해하고, 대궐로 쳐들어가 숨어 있던 민겸호를 죽였다. 전임 선혜청 당상이었던 탐관오리 김보현도 군인들에게 맞아 죽었다.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계훈의 재치로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군인들에게 급료가 지급되지 않고 있던 것을 고종도 뻔히 알고 있었다. 군인들이 엉터리 쌀을 받고 관료를 구타한 사건 역시 당일 보고되었다. 하지만 9일까지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가 군인들이 폭발한 뒤에야 이경하를 파직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었다. 일찌감치 막을 수도 있었던 것을 외삼촌인 척족 민겸호를 감싸고 있다가 더 큰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작년 여름에 일어난 해병대 제1사단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이 이제 곧 1년이 된다. 부실한 장비를 지급하여 사건이 벌어질 빌미를 제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책임은 누가 지는지조차 아직도 분명해지지 않았다. 이 사건이 1년이나 진실 공방을 해야 하는 그런 일이겠는가? 상관의 명에 의해 목숨을 내놓은 군인의 넋을 기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노력할 때다. 실체적 진실이 빨리 밝혀지길 기대한다.


이문영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