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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백 바위벽을 걷는 2만년 전 영혼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 2024-06-08 01:40:00

호주 퀸즐랜드주 케이프요크반도 로라 고원지대의 붉은 사암벽에 원주민들이 약 2만 년 전부터 1200년 전까지 그린 암벽화를 원주민 후손 가이드가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선사시대 예술 작품이다. 구석기시대인들이 그려 넣은 소와 말 그림은 숨소리가 들릴 듯 생생하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봤을 때도 감동이었다. 그런데 호주 북동부 퀸즐랜드주 고원지대에서 만난 선사시대 암벽화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 호주 아웃백 암벽화 투어


붉은 바위가 처마처럼 암벽화를 보호한다. 

호주에서는 붉은 사막이나 초원, 숲 같은 내륙 지역 황무지를 아웃백(outback)이라고 부른다. 아웃백에는 원주민들이 1만 년 이전에 그린 암벽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많다.

호주 북동부 최북단 퀸즐랜드주 케언스에서 케이프요크반도 방향으로 날아오른 헬리콥터는 데인트리 열대우림 위를 날아갔다. 1억2000만 년 동안 기후가 변화하는 가운데 살아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열대우림’이다. 구불구불한 강물이 흐르는 로라 고원지대 위를 난 지 1시간여. 헬기가 산속 캠프장에 착륙했다. 카우보이모자 비슷한 둥그런 모자를 쓴 조니 무리슨 씨와 개가 여행객을 반갑게 맞는다. 이곳은 원주민 쿠쿠얄란지 부족의 땅. 관광객들은 헬기 대신 로라 타운에서 사륜구동 트럭을 타고 약 35분 동안 오프로드를 달려 도착하기도 한다.

로라 고원지대 자라말리 캠프장 오두막에서 내려다본 사암 절벽 협곡. 

자라말리 암벽화 투어를 진행하는 무리슨 씨는 원주민 가이드다. 그의 오두막에 들어서니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에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랜드캐니언을 방불케 하는 붉은색, 노란색 사암 절벽 협곡이 펼쳐졌다.

웰컴 드링크를 맛본 후 본격적으로 선사시대 암벽화 투어에 나섰다. 약 1km쯤 산길을 걸어가자 절벽 중간에 길이 약 40m 암벽화가 나타났다. 노천이지만 거대한 붉은 바위가 천연 지붕을 이루고 있어 비도 잘 들이치지 않아 그림이 완벽히 보존될 조건을 갖춘 ‘경이로운 미술관’이었다.

“저쪽 아래를 보세요. 우리 선조들의 영혼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무리슨 씨는 암벽화 입구 부분의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그림을 막대기로 가리켰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암벽화 속 선사시대 사람과 동물 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캥거루가 뛰고 악어가 기어 다니고 에뮤(타조처럼 생긴 호주 국조·國鳥)가 긴 다리를 휘청이며 걷는다. 암벽화에는 약 450점이 그려져 있다. 호주 고고학자들은 2만여 년 전부터 1200년 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무리슨 씨는 호주 여러 박물관 고고학자들과 협력해 암각화 보존과 조사 및 3차원(3D) 기록 작업에 참여해 왔다.

암벽화 곳곳에 그려진 ‘퀸칸’ 그림. 

그는 “이 벽화 주인공은 바로 퀸칸(Quinkan)”이라면서 한 그림을 지목했다. 그림 가운데 키가 큰 사람이 양손을 벌리고 있다. 태양처럼 빛나는 머리 장식을 하고 벨트를 맨 남자 모습이다. 퀸칸은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긴데, 일부는 선(善)하고 일부는 악(惡)한 존재라고 한다. 인근 로라 분지 산악지대에 있는 약 1만 개의 원주민 암벽화 유적 대부분에 퀸칸이 그려져 있어 이 지역을 ‘퀸칸 컨트리’라고도 부른다.

전통 악기 디저리두를 연주하는 원주민 가이드. 

무리슨 씨는 암벽화 설명을 마치고 바위에 앉아 원주민 전통 악기 디저리두를 연주했다. 흰개미가 갉아먹어 속이 빈 유칼립투스 나무로 만든 악기로 길이가 1m를 넘는다. 입술 진동만으로 바람 소리, 천둥소리뿐 아니라 뜀박질하는 캥거루 모습까지 표현해 냈다. 돌 지붕까지 갖춘 자연 미술관이어서인지 디저리두의 저음이 더 잘 울려 퍼졌다. 이곳이 선사시대 원주민들에게는 매혹적인 갤러리이자 콘서트홀이었음을 알게 하는 장면이었다.

원주민들이 암벽에 남긴 손도장. 

디저리두 연주를 들으며 벽화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벽화 속 여러 그림 중에서도 원주민들이 남긴 손도장에 특히 마음이 갔다. 선사시대 예술가들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손바닥 서명을 한 것일까.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도 길바닥에 손바닥 도장을 찍지 않는가. 암벽화 손도장에 내 손바닥을 겹쳐 사진을 찍어 본다. 수천, 수만 년을 넘어 선사시대 아티스트의 영혼이 느껴지는 듯했다.

● 원주민 문화 여행


지난달 20∼23일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 최대 관광교역전 ATE24에는 호주 및 글로벌 관광업계 관계자 2200여 명이 참여했다. 2032년 브리즈번 올림픽을 앞두고 다양한 관광 인프라에 투자 중인 호주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가 원주민 문화 체험 여행이다.

호주 원주민은 약 4만∼7만 년 전에 호주 대륙에 들어와서 살았다. 지금도 전체 호주 인구 약 3.3%인 81만여 명이 살고 있다. 250여 년 전 영국인들이 호주에 진입한 이후 원주민들은 세균과 전염병, 학살 등으로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차별받던 원주민들은 1967년에서야 시민권을, 1984년 투표권을 인정받았다. 2008년 케빈 러드 호주 총리가 원주민에 대한 과거사를 공식 사과한 이후 호주 정부는 원주민 역사와 문화를 포용하는 작업에 나섰다. 호주가 250년 정도의 역사가 아니라 7만 년 된 전통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것을 내세우는 관광 전략인 셈이다.

골드코스트 젤루갈 원주민 문화센터 공연단과 관객들. 

ATE24 개막 직전 진행된 팸투어 타이틀도 ‘퀸즐랜드 원주민 문화 투어’였다. 골드코스트 젤루갈 원주민 문화센터에서는 원주민 출신 가이드가 함께 산책하면서 암벽에서 캐낸 흙을 물에 개어 피부에 바르는 보디페인팅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커럼빈 야생동물공원에서도 로리킷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는 쇼와 함께 원주민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공연이 인기였다.

원주민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민제리바섬 해변 텐트. 

호주 브리즈번에서 페리를 타고 40분이면 갈 수 있는 노스스트래드브로크섬은 원주민어로 민제리바섬으로 불린다. 호주 콴다무카 부족이 2만5000년 전부터 살아온 이 섬에서는 원주민이 가이드하는 투어가 있다. 원주민 아티스트 공방에서 조개껍데기와 나무껍질을 엮어 만든 작품을 감상하고, 해변 텐트에서는 해산물과 허브를 활용한 원주민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민제리바섬 브라운 호수의 갈색 물빛. 

원주민 가이드 엘리사 키식 씨는 “블러드우드의 붉은색 수액을 바르면 상처가 잘 낫고, 호주 토종 티트리(Tea Tree)가 많아 물빛이 갈색을 띠는 브라운 호수 물로 세수하면 피부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원주민 문화 여행에서 가장 흥미로운 프로그램은 ‘부시 터커(Bush Tucker)’. 야채, 과일, 벌레가 흔한 수풀 속 천연 재료를 가지고 약과 음식을 구하는 방법을 배운다. 자라말리 암벽화 투어 가이드 무리슨 씨는 노란색 솔잎처럼 생긴 가지를 짜서 나오는 즙으로 레모네이드 향이 나는 차를 만들어주는가 하면, 배 안에 꿀을 저장해 놓는 꿀개미를 손으로 잡아 향기를 맡아 보라고 하기도 했다. 그는 “꿀개미를 입에 넣고 씹으면 톡 하고 꿀이 터져 나온다. 항균 효과가 뛰어나 감기나 인후통에 걸렸을 때 사용하는 원주민 특효약”이라고 말했다.

● 그레이트배리어리프

세계 최대 산호초 지대 그레이트배리어리프의 ‘니모’. 

그레이트배리어리프의 대왕조개. 

퀸즐랜드주 해안에 있는 세계 최대 산호초 지대 그레이트배리어리프는 남북으로 약 2000km에 걸쳐 있다. 400여 종의 산호와 초록거북, 듀공 같은 멸종위기 해양 생물을 비롯한 어류 1500여 종이 살고 있다. 케언스 항구에서 출발한 ‘리프 매직호’를 타고 약 2시간을 가면 산호초 지대에 도착한다.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메고 잠수해 보니 화려한 산호초가 정글처럼 우거져 있다. 말미잘 속에 사는 주홍색 ‘니모’(클라운피시·흰동가리)는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에 나온 그대로이고, 헤엄치는 상어에다 보티첼리 명화 ‘비너스의 탄생’에 나오는 대왕조개가 입을 벌리고 있다.

그레이트배리어리프는 케언스에서 그린아일랜드로 향하는 배(소요 시간 약 45분)를 타고 가 산호초 위에서 스노클링을 즐겨도 좋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레이디엘리엇섬에 가면 날개 길이가 9m에 이르는 만타레이(쥐가오리)와 함께 헤엄칠 수도 있다.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 남극대륙에서 온 혹등고래 약 2만5000마리가 그레이트배리어리프에서 새끼를 낳는다. 퀸즐랜드 관광청 셜리 윈켈 씨는 “이 시기엔 엄마와 아기 혹등고래가 물 위로 올라 숨 쉬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퀸즐랜드=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