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인 일본은 태평양의 섬들을 군사기지로 만들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활용했다. 일본 해군이 막강할 땐 통하는 전략이었지만 1943년 이후 전세가 기울면서 이 섬들은 일본군의 무덤이 됐다. 미국은 전력이 약한 섬을 골라 띄엄띄엄 점령하고 나머지 섬들은 해상만 봉쇄하는 ‘개구리 뛰기’ 작전을 폈다. 그렇게 식량과 무기 보급을 차단하면 고립무원에 갇힌 일본군은 굶주림의 지옥으로 내몰렸다.
▷남태평양 마셜제도에 있는 산호초 섬 밀리환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섬에는 일본군 3600여 명 외에 군사시설 건설 목적으로 전남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조선인 1000여 명이 있었다. 미군 함정이 이 섬을 포위하면서 보급선의 접근이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섬 안의 군인들에게 각자도생하라고 지시했다. 해안가엔 미군이 있어 물고기를 잡긴 어려웠고, 벌레나 쥐를 잡아 겨우 연명했다.
▷조선인들 중에는 노역에 끌려 나갔다가 실종되는 이들이 늘어갔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살해해 인육을 먹는다는 공포가 확산됐다. 일본군이 고래고기라며 고깃덩어리를 던져준 날, 몇몇 조선인들은 사라진 동료를 찾아 나섰다가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했다. 허벅지 살이 도려진 채 뼈만 남은 조선인의 시체가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거나, 잡아먹히게 될 운명 앞에서 조선인들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일본군 감시병을 제압한 뒤 미군에 투항하자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45년 3월 감시병 11명 중 7명을 제거하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살아 도주한 병사가 군 병력을 데리고 왔다. 조선인 55명이 학살됐고, 나머지는 야자나무 위 등으로 숨어 목숨을 건졌다.
▷당시 미군에 구조된 조선인들 사진을 보면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온몸이 까맣게 타 있고 뼈만 앙상한 모습이다. 밀리환초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국가는 섬에 고립된 아군을 버렸고, 버림받은 군인들이 타국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을 학살하도록 방치한 나라가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