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위축에도 125억달러치 구입 韓-대만-북미-日 합계보다 많아 中, 구형 반도체 분야 집중 투자 ‘제3국 편법수입 차단’ 미리 대응
올해 1분기(1∼3월) 중국이 글로벌 반도체 장비 구매를 작년 같은 기간보다 두 배로 늘린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뿐 아니라 북미, 일본 등 주요 국가와 지역이 대부분 장비 구매를 줄였지만 중국은 반대 행보를 보인 것이다. 중국 정부 및 기업들이 미국 주도의 대중(對中) 반도체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미리 장비를 대거 사재기한 결과로 풀이된다.
9일 국제반도체장비재료산업협회(SEMI)에 따르면 1분기 글로벌 반도체 장비 구매액(매출)은 264억 달러(약 36조46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2% 감소했다. SEMI가 협회 회원사와 일본반도체장비협회(SEAJ)에서 제출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 발생한 반도체 장비 청구액을 집계한 결과다.
하지만 중국은 113% 늘어난 125억2000만 달러의 반도체 장비를 구매했다. 전체 구매액의 절반에 육박하고, 한국 대만 북미 일본 등 네 지역을 모두 합친 구매액 112억5000만 달러보다 10%가량 많다.
본보가 유엔 무역통계를 분석한 결과 올해 1∼3월 미국, 일본, 네덜란드가 중국으로 수출한 반도체 장비(HS코드 848620)는 134.8% 늘어났다. 금액으로는 지난해 1분기 24억2700만 달러에서 올해 1분기 56억9900만 달러로 2배 이상으로 커졌다.
특히 네덜란드의 중국 수출액이 4억6700만 달러에서 22억5500만 달러로 383.1%나 뛰었다. 네덜란드에는 중국이 미세공정에서 가장 애를 먹고 있는 노광(웨이퍼에 회로를 그리는 작업) 분야 1위 장비회사인 ASML이 있다.
중국 이외 주요 반도체 제조국들의 장비 구매액은 같은 기간 일제히 감소했다. 한국은 7% 줄었고 북미는 33%, 일본은 4% 줄었다. 특히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인 TSMC 본사가 있는 대만은 66% 급감했다. TSMC는 4월 1분기 실적발표 자리에서 올해 파운드리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약 20%’에서 ‘10% 중후반’으로 하향 조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TSMC가 공식 발표에 앞서 이미 내부적으로 시설투자의 속도 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국내 한 장비업체 임원은 “보통 반도체 산업에서 장비 구매는 후행(後行) 지표”라며 “제조사들은 산업이 좋아지면 회전이 빠른 소재, 부품부터 확보하고 시간이 걸리는 장비는 1, 2개 분기 이후부터 늘리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1분기 반도체 장비 구매를 줄인 게 반도체 산업의 침체 신호로 읽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박현익 기자 bee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