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축구 국가대표 이영표가 3월 열린 2024 서울마라톤 겸 제94회 동아마라톤에서 첫 풀코스를 완주한 뒤 기념 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영표는 첫 풀코스 도전에서 서브4에 성공했다. 이영표 인스타그램
이 대회에선 모두 1만8000명이 풀코스를 뛰었다. 이영표는 그중 7400번째로 골인했다. 그보다 앞서 결승선을 통과한 여성 마라토너도 1000명이 넘었다. 그는 “먹고 뛰는 게 일이었던 나 같은 축구 선수 출신도 훈련 없이는 완주 못 하는 게 마라톤이다. 반면 아무리 체력이 약한 사람도 준비만 제대로 하면 완주할 수 있다”며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반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마라톤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었던 이영표와 박지성의 한 이벤트 대회 경기 모습. 동아일보 DB
다음 만남 때 다시 함께 10km를 뛰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션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한순간 깨달음이 왔다. “달리기는 기분이 좋은 상태도 기분 좋을 만큼만 뛰면 된다”는 것을.
올해 서울마라톤을 완주한 이영표(왼쪽에서 두 번째)와 달리기 마니아로 유명한 가수 션(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모습. 동아일보 DB
그는 션과 ‘언노운 크루’라는 러닝 크루를 만들었다. 축구 선수 출신으로는 그와 조원희가, 연예인으로는 이시영 임시완 박보검 양동근 윤세아 등이 크루에 가입했다. 언노운 크루는 단순히 달리는 것을 넘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매년 광복절에 81.5km를 달리는 815런을 통해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보금자리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게 대표적이다.
이영표는 “달리기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건강에도 좋은 스포츠다. 아마도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라며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다. 운동화만 있으면 되니 비용도 크게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영표는 달리기와 함께 사이클도 병행한다. 이영표 인스타그램
첫 풀코스 출전이다 보니 시행착오도 있었다. 수분 섭취가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출발 전 물을 너무 많이 마신 게 문제였다. 결국 5km 정도 달리다가 인근 카페의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서브4가 위태로워 질 뻔했다.
하지만 두 명의 페이스 메이커가 그를 도왔다. 힘들 때는 옆에서 같이 뛰어줬고, 보급이 필요할 때는 물과 에너지 젤 등을 가져다줬다. 그는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번 대회를 통해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인생도, 마라톤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그분들은 나를 위해 자신들의 속도를 줄여서 뛰었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서브4는 물론 완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게 삶의 본질인 것 같다”고 했다.
이영표(왼쪽)가 2022년에 열린 월드컵 레전드 올스타전에서 송종국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동아일보 DB
그런 이유로 그는 요즘 뛰고 또 뛴다. 언노운 크루 멤버들과 일주일에 2, 3차례는 아침마다 5~10km 가량을 달린다. 틈틈이 자전거도 탄다. 로드 바이크를 타고 경기 팔당까지 왕복 40km를 다녀올 때도 있고, 실내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그는 “달리기를 많이 하면 다리과 허벅지 근육이 빠진다. 그 빠진 근육을 채워주는 게 바로 사이클”이라며 “모든 건강의 척도는 허벅지란 말이 있지 않나. 허벅지 근력 강화에는 사이클만한 운동이 없다”고 했다.
이영표는 몇 해 전부터 KBS의 축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당시 이광용 캐스터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영표 인스타그램
하지만 여전히 메인 운동은 러닝과 근력 운동이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러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주일에 2, 3차례는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근육 운동을 한다. 오랜 시간 하기보다는 10분, 20분을 하더라도 집중해서 한다.
술과 담배는 하지 않는 이영표는 바닐라 라테를 마시며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그가 여전히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축구 행정이다. 그는 “선수 은퇴 후 지도자가 돼 후배들에게 기술과 노하우를 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유럽에 진출해 경험을 하다 보니 행정을 잘하면 축구가 더 발전하는 모습을 봤다”며 “후배들이 마음 놓고 축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 좋은 지도자분들은 이미 많이 계신다. 나는 행정을 하는 사람으로 한국 축구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 2년을 스포츠 비즈니스가 발달한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밴쿠버 화이트캡스에서 은퇴한 후에도 5년간 팀의 앰배서더로 활동하며 구단 운영 등을 꾸준히 배웠다.
EPL 토트넘에서 뛰던 이영표(왼쪽)이 일본인 축구 스타 나카타 히데토시와 공을 다투고 있다. AP뉴시스
이영표는 “예전의 나는 성공하는 게 인생 목표였다. 원하는 것을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은퇴 후 엄청난 허무감에 시달리기도 했다”며 “몇 해 전 어느 날 쌀쌀한 날씨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를 마시다가 문득 행복하다고 느꼈다. 마침 옆에는 사랑하는 아내도 있었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인 중에 다른 사람의 임종을 함께 해주시는 목사님이 있다. 그분이 ‘죽기 전 돈과 명예, 권력을 얘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주변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하시더라. 나도 그 말씀을 새기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