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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구호 아닌 속마음 들여다봐”…연애 리얼리티 같은 벨기에의 정치연대 TV쇼

입력 | 2024-06-10 20:25:00


벨기에의 정치 리얼리티쇼 ‘콘클라베’에서 알렉산더르 더크로 총리(오른쪽)가 ‘플람스 연합’의 바트 더베버 대표에게 연대를 촉구하는 모습. 벨기에 민영방송 VTM 캡처

“또 헛소리(bullshit)하려고 왔고만.”

입소 첫날 숙소 현관문으로 걸어오는 출연자 A 씨를 보며 B 씨가 혼잣말을 했다. B 씨는 원래 알던 사이인 A 씨를 업신여긴다. A 씨가 ‘뜬구름 잡는 이념 싸움에 몰두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날 밤 두 사람은 모닥불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무리에서 겉돌던 A 씨가 못내 신경 쓰였는지 B 씨는 “왜 혼자 이러고 있냐”며 말을 걸었다. 둘의 대화는 A 씨의 “우리는 결국 함께할 운명”이라는 구애로 끝났다.

출연자 간 지독한 인연은 마치 연애 리얼리티쇼에 나올 듯한 소재지만 이 프로그램은 벨기에 정치지도자 7명이 출연한 4부작 정치 다큐멘터리 ‘콘클라베’다. A 씨는 9일 치러진 벨기에 총선에서 원내 제2당으로 등극한 극우 ‘플람스 이익’의 톰 판흐리컨 대표, B 씨는 제1당 중도 우파 ‘플람스 새연합’의 바르트 더베버르 대표다.

벨기에 민영방송 VTM 캡처

선거 사흘 전인 6일 종영한 이 방송은 현지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벨기에 일간 디스텐다드는 “정치인들은 본래 훌륭한 연기자지만 24시간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미묘한 표정과 기류까지 숨기지는 못했다”고 호평했다.

콘클라베는 벨기에 민영 VTM 방송이 “토론회장에서 꺼내놓지 않는 속마음을 들어보고 싶다”고 정치권에 제안하자 알렉산더르 더크로 총리 등 중진 정치인 7명이 화답하며 추진됐다. 이들은 올 4월 수도 브뤼셀에서 110km 떨어진 울창한 숲속 성(城)에서 주말을 함께 보냈다. 함께 요리하고 산책하는가 하면 끼리끼리 일 대 일 대화를 하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벨기에 민영방송 VTM 캡처

연애 리얼리티쇼 형식이 벨기에 정계 모습을 담기에 적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를 쓰는 북부와 프랑스어를 쓰는 남부로 나뉜데다 지역 안에서도 정당이 다양하다. 매번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정당 4~7개가 합종연횡하다 보니 정당 간 구애가 일상화됐다.

방송에서 ‘플람스 새연합’의 더베버르 대표는 더크로 총리에게도 러브콜을 받았다. 둘은 2020년 연정 수립 협상이 와해된 뒤 4년 만에 마주앉았다. 더크로 총리는 “다음번 연정에 참여해달라”고 설득했지만 더베버르 대표는 “우리 사이는 신뢰를 잃은 지 오래”라며 “후회할 말을 하지 말자”며 자리를 떴다.

더베버르 대표와 판흐리컨 대표는 어떻게 됐을까. 두 정당은 인구 1100만 명 중 약 60%를 차지하며 경제적으로 발전한 북부의 분리 독립을 지향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강력한 연정 파트너로 꼽힌다. 더베버르 대표는 다른 출연자들의 끈질긴 질문에 마침내 쐐기를 박았다.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는 자(판흐리컨 대표)와는 손잡지 못한다.”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