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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희창]과학인 ‘영일만 석유’를 정치로 가져온 건 정부

입력 | 2024-06-11 23:12:00

박희창 경제부 차장



대통령의 입을 거치는 순간 ‘과학’도 ‘정치’에 한 발 걸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일주일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취임 후 첫 국정브리핑을 열고 경북 포항 영일만 앞 심해의 석유·가스 매장 가능성을 직접 발표했다. 보고를 받고 대통령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정치적 고려 없이 단순히 파급력이 큰 과학적 사실을 국민들에게 직접 설명해야 한다는 판단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첫발을 대통령의 ‘깜짝 발표’로 떼면서 영일만 앞 석유 탐사와 개발은 과학의 영역에만 머무를 순 없게 됐다.

미국 액트지오의 비토르 아브레우 고문은 최근 동아일보에 “동해에서 이미 세 차례 시추가 이뤄졌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폭발적일 만큼 여론이 들끓었느냐”고 반문했다. 아브레우 고문이 최대 140억 배럴의 석유와 가스가 묻혀 있을 수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은 영일만 앞 심해에서 한국석유공사는 2012년부터 세 번 시추를 진행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이번에 그 시추공들의 존재를 알았다. 정부 출범 이후 최저치로 떨어진 국정 운영 지지율과 정부 안에서 나오는 “담당 국장이 발표하면 됐을 사안”이란 평가는 여론이 들끓게 된 이유 한 조각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에 과도한 기대감을 덧씌운 것 역시 정부였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40억 배럴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 정도”라고 했다. 석유 탐사와 개발은 과학이다. 거기다 경제가 더해진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매장량’이라는 단어부터 엄격히 구분해서 쓴다. 석유 탐사·개발에서 매장량이라고 하면 시추를 통해 부존 여부와 경제적 가치를 모두 확인한 양이다. 즉, 불확실성 없이 검증된 기술로 상업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양을 뜻한다. 담당 장관이 경제성은커녕 실제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양을 갖고 약 2200조 원의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이성적 판단보단 비이성적 과열이 가득 찬 투기판도 깔아줬다. 대통령이 탐사 시추 계획 승인을 발표한 건 오전 10시쯤이었다. 주식 거래가 한창인 시간이었다. 당장 “그래서 어떤 종목을 사야 되냐”란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회사 이름에 ‘석유’라는 두 글자만 들어가 있어도 주가가 뛰었다. 이날 상한가로 장을 마친 한국석유는 아스팔트 제조·유통기업으로 석유 시추와는 큰 관련이 없었다. 통상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항들은 장 마감 이후에 발표한다. 다음 달이나 돼야 첫 시추에 나설 탐사 작업을 개장 1시간 만에 급히 발표한 이유는 찾기 어렵다.

정부와 여당은 “야당이 과학의 영역까지 정치화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일만 앞 석유 탐사를 정치로 끌고 간 건 정부다. 심지어 정부와 석유공사는 야당의 자료 제출 요구에 ‘영업상 비밀’을 내세우며 대부분 거부하고 있다. 액트지오의 분석 결과를 검증한 자문단을 어떻게 추천했는지에 대한 자료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갑자기 정보 공개 취지에 맞게 문서를 재분류했다며 온라인에 부분공개로 올려놨던 탐사 프로젝트 관련 자료 일부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정부가 이미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간 영일만 앞 심해 석유 탐사·개발을 다시 과학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과학적 논의의 출발점인 기본적인 데이터부터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