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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정미경]보내지도 않을 편지 쓰며 격노 참은 링컨 대통령

입력 | 2024-06-11 23:15:00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격노’라는 단어가 화제다. ‘격노’ ‘분노’ ‘진노’ 등 노(怒)자 들어가는 단어들의 차이점을 주변에 물어봤다. 확실한 차이는 몰라도 격노가 가장 화난 상태 같다는 것이 공통된 반응이다. 격(激) 때문이다.


현명한 리더는 화를 다스리는 법을 안다


과연 격노할 문제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사안의 성격상 오히려 차분한 설득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일반인도 격노하면 무서운데 대통령이 격노했으니 상대방의 가슴이 얼마나 벌렁거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화 잘 내는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격노가 취미인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크게 화를 낸 사건은 2020년 대선 한 달 후 윌리엄 바 법무장관이 선거 부정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언론에 말했을 때였다. 선거 부정을 계속 주장해온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실을 보고받았을 때 케첩을 듬뿍 바른 햄버거를 먹고 있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벽에 내던졌다. 케첩이 벽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백악관 직원들은 “화산이 폭발하는 줄 알았다”(volcanic), “기차가 탈선한 것 같았다”(off the rails)라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 장관은 2주 뒤 물러났고, 트럼프 대통령의 ‘충복’에서 ‘비판자’로 변신했다.

어려운 결정을 자주 내려야 하는 대통령은 화를 낼 일도 많은 자리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능력이다. 미국인들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뛰어난 분노 조절 능력 때문이다.

남북전쟁 때 북군의 조지 미드 장군은 게티즈버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과정에서 남군의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의 도주를 허용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친 링컨 대통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미드 장군을 소환하지도 질책하지도 않았다. 일단 며칠을 보낸 뒤 미드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내용은 예의를 갖췄고 공손하기까지 했다. ‘리 장군을 체포했다면’이라는 소망을 적었다.

편지는 사실 헛수고였다. 완성된 후 책상 한쪽의 서류철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Not Signed, Not Sent’(서명하지 않고 보내지 않은 편지함)라고 적힌 서류철에는 이미 편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대면이 아닌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발송하지 않는 다중의 안전장치를 택한 것이다.

현명한 리더는 냉각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미국인들은 ‘쿨링오프’라고 부른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지고, 분노의 표적이 되는 대상은 변명에 급급해지기 마련이다. 미드 장군에게 화를 내는 대신 링컨 대통령은 얼마 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구절이 담긴 미국 최고의 연설 게티즈버그 연설을 탄생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분노의 서랍’ 지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는 ‘분노의 서랍’(anger drawer)이 있었다. 화나게 만든 사람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 책상 마지막 서랍에 넣고 잠근 뒤 깨끗하게 잊는 것이다. 전임자였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좌우명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만큼 섹시하지는 않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책상 위에도 팻말이 놓여 있었다. ‘Gently in Manner, Strong in Deed’(태도는 부드럽게, 행동은 단호하게).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수많은 군인의 목숨을 책임졌던 그는 부하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다시 트럼프 대통령으로 돌아와 ‘햄버거 패대기 사건’ 이후 미국인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 “당신이 흘린 케첩은 당신이 닦으시오.” 격노의 뒷수습은 상대방도 아닌, 국민도 아닌, 당사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