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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인이 쓰던 단어, 국내서도 직접 연구할수 있게 돼”

입력 | 2024-06-12 03:00:00

인류 첫 소설 ‘시누헤 이야기’ 원전
유성환 박사, 한국어 번역 책 펴내
“이집트 원전 계속 번역해 알릴 것”



10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고대 이집트 문헌학자 유성환 박사가 자신의 신간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를 들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공포, 질투심, 자부심…. 지금도 보편적으로 느끼는 인간의 감정이 이집트 고대 문헌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어요. 문명 최초의 얼굴이 드러나 있다고 할까요.”

10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고대 이집트 문헌학자 유성환 박사(54·서울대 인문학연구소 선임연구원)는 이렇게 말했다. 유 박사는 지난달 고대 이집트어로 쓰인 인류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를 한국어로 번역한 책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휴머니스트)를 펴냈다.

번역본은 ‘베를린 파피루스 3022’ 등 원전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되 영미권의 다른 번역본도 두루 참조해 만들어졌다. 그동안 ‘시누헤 이야기’의 다른 외국어 번역본이 한국어로 옮겨진 적은 있었지만, 고대 이집트어 원전을 한국어로 완역해 한 권으로 엮은 것은 처음이다. 그는 “인문학을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전이 중요하다”며 “책 출간을 계기로 학계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하던 텍스트를 쉽게 인용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시누헤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 중왕국 초기 제12왕조(기원전 1985년∼기원전 1773년)를 연 아멘엠하트 1세의 서거가 배경이다. 당시 왕자를 수행하기 위해 외국에 머무르던 궁정 관리인 시누헤는 국왕의 서거에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레체누(오늘날의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로 도망간다. 그는 고초 끝에 외국에 정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오매불망 고국으로 돌아가길 기도하던 끝에 후대 왕의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전형적인 이집트식 ‘해피엔딩’이죠.” 유 박사는 “내세를 중시하던 당시 이집트인들은 외국에서 죽으면 신 ‘오시리스’에게 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이를 무척 두려워했다”면서 “‘비문명(외국)’에서 ‘문명(이집트)’으로 돌아온다는 이집트 상류층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서사가 돋보인다”고 말했다.

부산대 영문과를 나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1학년생이었던 그는 1997년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이자 소설가인 크리스티앙 자크의 책 ‘이집트 상형문자 이야기’로 상형문자를 처음 접했다. “물고기, 여자, 올빼미…. 다 그림이잖아요. 그런데 음가도 있고, 읽을 수도 있고 문자의 기능을 한다는 게 신기했어요.” 상형문자의 매력에 빠진 그는 처음에는 아마존에서 구입한 문법책으로 혼자 이집트어를 탐독했지만, 제대로 원전을 읽는 단계에 들어서자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막막함을 느꼈다. 대학원 졸업 후 계약직 통번역사(영어)로 일하면서 정체되는 느낌도 받았다.

결국 그는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직접 외국으로 건너가는 길을 선택했다. 서른다섯 살이던 2005년 미국 브라운대 이집트학과에 진학했고, 2012년 박사학위까지 딴 것이다. 미국에서도 이집트 문헌학 전공자는 드물었다. 교수에게 일대일로 원전 독해 수업을 들은 적도 있을 만큼 연구는 외길 같았지만, 묵묵히 그 길을 걸었다. 국내로 돌아와 2013년부터는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학생들에게 이집트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인문 고전의 매력으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고대부터 휘황찬란한 문명을 이룬 우리가 과거의 사람들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얼마나 변하지 않는가를 동시에 고찰할 수 있는 게 인문학”이라며 “이번 번역이 인간에 대한 희미한 그림을 그려보는 인문학에 (퍼즐 조각) 한두 피스 정도 기여하지 않았을까”라며 그는 웃었다. 신간에는 원전 번역과 풍부한 주해는 물론이고 이집트 문명의 인·지명, 풍습, 종교관 등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잘 녹아 있다. 그는 “이번 출간을 계기로 ‘난파당한 선원’ 등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이집트 원전들을 순차적으로 번역해 대중에게 알리겠다”고 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