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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최초 법무사 “무법천지 北에서 두 오빠 잃었어요”[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4-06-13 16:30:00


탈북민 출신 최초로 법무사가 된 임윤미 씨. 그의 삶은 북한이 어떤 체제인지를 잘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임윤미 씨의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봤던 히로시마 원폭의 버섯구름을 생생히 기억했다. 어머니 형제는 10명이었는데, 히로시마에서 제재소 운영을 하던 할아버지가 폭격에 대비한다며 가족을 시골로 피난시킨 덕에 모두 무사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시내에 머물고 있던 맏오빠 부인은 시신도 찾지 못했다.

그때는 버섯구름이 장차 가족들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다줄지 아무도 몰랐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할아버지 제재소는 잠시 유지되는 듯 하다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미쓰비시에 다녔던 큰 외삼촌은 종전 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났다.

열 식구 넘는 대가족이 할머니의 작은 구멍가게 하나에 의지해 살았다. 할아버지의 목수일도 대식솔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임 씨 어머니와 바로 위 오빠, 동생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1959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민족 대이동’이라고 불린 북송사업이 시작됐다. 임 씨 어머니 가족도 북으로 갈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일본 육사 재학생 신분으로 해방을 맞았던 둘째 외삼촌은 누구보다 강력하게 북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잘 생긴데다 머리도 좋아 수재로 불렸던 외삼촌은 일제 패망 이후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됐다. 자식들에게 공부를 더 못시킨 것을 가슴 아파했던 할아버지도 고향은 한국이었지만 북한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미 결혼한 첫째, 셋째 외삼촌 가족 등이 대거 북한 행을 결정했다.

임 씨 어머니는 히로시마의 일본 명문학교인 야스다 료 부속여학교를 다녔다. 그러다보니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조총련의 선전을 믿지 않았다. 조총련 간부가 집으로 찾아와 “너는 자유가 뭔지 알기나 하냐”며 협박도 하고 회유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미 결혼한 언니, 오빠와 함께 임 씨 어머니는 일본에 남았다.

부모님과 일곱 형제가 북송선을 탄 2년 뒤 어머니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한데 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다 “갔다가 언제든 돌아올 방법이야 없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북송선에 올랐다. 심한 뱃멀미 끝에 도착한 청진항에서 처음 들은 소식은 아버지가 이미 열흘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가보니 그에게 협박을 했던 조총련 간부는 귀국 후 석 달 만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북한이 정말로 지상낙원이라고 믿었던 그는 귀국단 단장이 되어 누구보다 먼저 북송선에 올랐다. 하지만 북한에 도착해 실상을 체감하자마자 속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귀국 독려로 북송선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죽을 만큼 괴로워하기도 했다.

죽기 전 그는 임 씨의 할머니에게 “일본에 남은 딸이 정말 똑똑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똑똑했던 딸이 2년 뒤 북으로 건너올 줄을 그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임 씨 모친은 귀국 후 얼마 뒤 같은 북송 교포 출신의 성실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홀아버지와 단둘이 1차 북송선을 타고 온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가 태어났다. 1964년과 1966년에 아들이 태어났고, 1970년에 임윤미 씨가 태어났다.

북송을 거부하고 일본에 남았던 처녀 시절의 임 씨 모친(맨 오른쪽)이 일본에서 결혼생활을 하던 9살 연상의 언니와 찍은 사진. 남자와 아이들은 이모부와 조카들이다.



● 잇따라 끌려간 두 외삼촌
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들은 한결같이 “도착하는 순간 우리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선택을 되돌릴 순 없었다.

운전사로 열심히 일하며 혁신자로 인정받은 임 씨 아버지는 1970년대 초반 귀국자로서는 드물게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임 씨 어머니 역시 귀국할 때 하고 갔던 금목걸이와 금반지까지 국가에 바쳤다. 당시는 귀국자들에게 금붙이든 뭐든 기부를 독려하던 분위기였다. 고지식했던 어머니는 하루 밤 옆에서 같이 자자는 아픈 할머니의 간청도 마다하고 밤일을 나갔다가 모친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을 두고두고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북한 체제는 이들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북송교포들은 감시와 차별의 대상이 됐다. 일본에 남아있는 재일동포들을 다루기 위한 인질에 불과했다. 말 한마디에 반동으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경우도 많았다.

임 씨 외삼촌 두 명도 그렇게 사라졌다. 누구보다 앞장서 북한으로 가자고 선동했던 둘째 외삼촌이 1970년대 초반에 형제 중에서 제일 먼저 잡혀갔다. 북한 체제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가 반동으로 끌려갔는데, 일본 육사를 다녔던 경력을 숨겼다고 ‘경력위조자’ 딱지도 붙었다.

북한에선 경력을 숨긴 사람은 엄중한 반동으로 취급한다. 영장도 재판도 없었다. 둘째 외삼촌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가족은 오지로 추방됐다. 행여 아들의 생사라도 알 수 있을까 싶어 외할머니는 날마다 도 보위부 정문으로 달려가 물어도 보고 온종일 기다려보았지만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셋째 외삼촌도 요덕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족이 농촌으로 쫓겨났다. “형이 그 정도 말한 게 뭔 죄냐”고 불만을 토로했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영장도 없이 잡혀간 것이다. 당시 간경변 말기로 입원을 하기로 돼 있었지만 자비는 없었다. 결국 요덕수용소에서 그는 한 달 만에 숨을 거뒀다.

오빠 두 명이 반동으로 끌려가 죽자 임 씨 어머니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형들 때문에 연좌제로 끌려가지 않을까 위축이 된 다른 외삼촌들도 묵묵히 직장만 다녔다. 임 씨의 아버지는 도시를 벗어나 농촌으로 자진해 갔다.

헤어진 지 60년 넘은 시간이 흘러간 2021년. 임 씨 모친(왼쪽)이 일본에 찾아가 언니(오른쪽)를 다시 만났다. 윗 사진에서 옆에 서있던 그 언니다. 가운데가 임 씨.




● 생사를 알 수 없는 맏오빠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임 씨가 12살 때 신의주 인근 석하리라는 농촌에 살던 그의 가족은 ‘김정일의 덕분’에 남신의주 시내로 이사하게 되었다.

석하리 주변에 김정일의 별장이 있었는데, 도당에서 석하리 일대를 사회주의 이상촌으로 꾸린다며 강제로 철거한 것이다. 장군님이 지나다니는 마을에 출신성분이 나쁜 임 씨네 가족은 살 수 없었다. 대신 남신의주에 터를 배정받아 집을 지었다. 이 역시도 돈 한 푼 지원받지 못한 채 모두 자비로 충당해야 했다.

임 씨가 14살이 되던 1984년 봄 어느 날, 아침에 학교 농촌동원을 간다며 집을 나간 맏오빠가 갑자기 사라졌다. 당시 그는 2년제 기능공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안전부에 실종 신고를 했지만 “알았으니 가서 기다리라”는 대답뿐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어디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말만 들리면 부리나케 달려갔다.

한 달 조금 지났을 때 보위부에서 부모를 불렀다. “당신 아들이 압록강을 헤엄쳐 중국으로 넘어가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을 찾아갔고, 공안에 넘겨져 북으로 송환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당시는 대량탈북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이전이라 탈북에 대해선 감히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다.

얼마 후 보위부에서 어머니를 따로 불러 일본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 대해 상세히 조사했다. 하지만 맏아들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10년 전 둘째 외삼촌이 끌려간 뒤 외할머니가 그러셨듯이 어머니는 매일 도 보위부 정문 앞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임 씨의 기억 속 맏오빠는 몸이 허약한 어머니를 극진히 위했던 효자였다. 집을 나가던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런 오빠가 정말 부모와 동생들을 버리고 중국으로 갔다가 강제송환됐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도 오빠가 어디엔가 살아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일본에 남은 외삼촌은 북한에 남아있는 형제들과 조카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계속 생활비를 보내주고 북한 당국에 기부도 했다. 1980년대엔 북한 굴지의 대기업인 신의주시 낙원기계연합기업소에 컴퓨터를 기증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에 그런 컴퓨터는 3대 밖에 없었다. 90년대 초반에는 낙원기계연합기업소에 식량을 지원하기도 했다.

덕분에 임 씨네는 비록 감시와 불안 속에 살아도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편이었다. 임 씨는 아무런 생활 걱정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학업성적도 괜찮았다. 그러나 출신성분을 따지는 북한에서 맏오빠 문제는 큰 걸림돌이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선 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다행히 1987년 여중 졸업과 동시에 신의주제1사범대학 어문학부 국문과에 입학했다. 1991년 대학 졸업 후에는 성적 우수자들이 가는 박사원(대학원)에 진학했다.

박사원에서는 문학이론을 전공하면서 ‘생활적 가사 창작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준비했다. 1년에 한 두번씩 평양에 올라가 인민대학습당에서 자료작업을 했고 작가인 지도교수를 따라 전국작가동맹회의도 참석해보았다. 그 때마다 북한의 일반인들은 보기 힘든 외국영화도 보고 작가 토론회도 경험하면서 시야와 견문을 넓혀나갔다. 그렇게 20대 초반의 임 씨는 꿈에 부풀었다. 집안의 불행도 끝난 줄 알았다.

1990년대 후반 탈북했을 당시의 임 씨(오른쪽)와 딸. 옆 남자는 중국에서 만난 친척이다.



● 억울하게 끌려간 작은 오빠, 가족의 추방
어느 날 집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과거 바다 일을 하다가 실수해 보위부에 잡혀갔는데, 예심 과정에 맏오빠를 만났다고 했다. 아들 소식에 목말라했던 임씨 부모님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반갑게 대해주었다. 청년이 찾아오는 횟수도 늘어났다.

둘째 오빠는 당시 신의주의학전문학교를 다녔는데, 형님을 봤었다는 그 남자와 점점 가까워졌다. 남자는 둘째 오빠에게 일부러 북한 체제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고, 오빠도 맞장구를 치게 유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자는 보위원의 스파이였다. 북송교포 출신인 임 씨네 집이 일본 친척의 도움으로 잘사는 것으로 보이자 이봉제라는 안전원이 보위원과 짜고 돈을 뜯어내기 위해 ‘작업’을 한 것이었다. 둘째 오빠가 한 말은 그대로 보위부에 들어갔다.

1993년 어느 날 아침 조사할 것이 있다며 안전부에서 둘째 오빠를 불렀다. 둘째 오빠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집을 나섰다. 임 씨가 본 둘째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임 씨 부모님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안전원 이봉제는 “아들을 꺼내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수시로 뇌물 상납을 요구했다. 술과 담배는 물론 당시 북한에선 엄청난 고가였던 컬러TV를 요구했다.

끝내 참지 못한 아버지가 폭발했다. 아들 때문에 마음 고생하다가 암 진단까지 받은 상태였던 아버지는 안전원과 대판 싸우고 말았다. 일은 더욱 험악하게 번졌다. 가택수색까지 들어왔다. 수색영장도 없이 온 집안을 헤집던 그들은 둘째 오빠의 일기장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며칠 뒤 집에 화물차가 들이닥쳤다. 임 씨 가족들은 강제로 태워졌다. 짐도 차에 실을 정도만 챙기라고 했다. 1994년 10월 말 북한의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차에 실린 임 씨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나 싶어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차가 멈춘 것은 한밤중이었다. 다행히 수용소는 아니었다. 농장 선전실로 보이는 건물 앞에 물건들을 던져놓고 차는 떠나버렸다. 추위 탓인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창백하게 떨고 있는 어머니와 딸에게 아버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잠시 후 임 씨는 다시 건물 밖으로 나서다가 쌓아놓은 짐짝들 옆에서 아버지의 어깨가 흔들리는 갓을 봤다. 죽을 때까지 가슴에 못 박혀 있을, 처음 본 아버지의 우는 모습이었다.

1999년 하나원 시절의 임 씨(왼쪽)와 어머니, 딸의 모습. 이들은 하나원 1기생이다.



● 다시 박사원으로 복직
그들이 추방된 곳은 평북 철산군이었다. 나중에 ‘서해위성발사장’이 건설돼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마을 인심은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은 마을 사람들 태반이 추방을 당해 온 신세였다는 것이다. 가족 중에 누가 잡혀가 추방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평양에 살다가 다리를 쩔뚝거린다거나 왜소증환자라서 쫓겨난 이들도 있었다.

졸지에 박사원생에서 청년분조 농장원으로 전락한 임 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추방되기 전 자신에게 청혼했던 남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3살 연상인 그 남자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응용수학과를 나와 신의주경공업대학 수학교원으로 있었다.

추방된 지 3일 만에 임 씨는 신의주로 가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도 미국에 친척이 있는 해외연고자 가족으로서 출세를 해봐야 기껏 대학교원이다.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 혹시 추방되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했다. 이어 “요즘 도당 대학 담당 부부장이 대학 교원들을 상대로 직접 강연을 하고 있다. 인간성도 좋고 능력도 있어 보인다. 기회를 봐서 한번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별로 기대하진 않았지만 임 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용기를 냈다. 의외로 부부장은 임씨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내가 배운 지식으로 오빠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고 싶다며 속에도 없는 말을 하는 임 씨에게 그는 알아볼 테니 일단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일주일 뒤 대학 초급당비서가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비서는 임 씨에게 “당과 수령의 배려로 임윤미 동무는 박사원을 다시 다니게 됐습니다”고 했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도당 대학 담당 부부장의 힘은 컸다.

한국 입국 직후 임 씨가 에버랜드로 놀러가 딸을 안고 사진을 찍은 모습.



● 둘째 오빠의 죽음, 그리고 탈북
임 씨는 결국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그 남자와 결혼했다. 고마운 이유도 있지만, 혼자 살다가는 언제 또 끌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컸다. 결혼은 그에게 도피처였다. 암 치료를 핑계로 추방된 부모님도 신의주로 모셔왔다.

하지만 둘째 오빠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안전부에 가니 보위부로 이송됐다고 하고, 보위부에 가니 안전부로 갔다는 식으로 서로 미루기만 했다. 훨씬 나중에 서류상 병사로 처리됐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병사가 맞는지, 아니면 고문 받다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신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북한은 그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둘째 오빠는 그들이 추방되기 전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돈 때문에 인질로 잡아두던 오빠가 죽자 다급해진 보위부는 임 씨 가족을 농촌에 추방시켜 입막음을 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얘기도 전해들은 것이라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임 씨가 결혼할 무렵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대기근 시대가 시작됐다. 자고 나면 아파트 앞에 유랑자인 ‘꽃제비’들의 시체가 뒹굴었다. 서로 책임지지 않겠다며 아파트 인민반장들끼리 시체 밀어내기를 했다. 국가가 시신을 처리할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곳곳에 동냥하는 꽃제비들이 들끓었고, 누구네 집이 강도를 당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하지만 TV에서는 우리나라 제일이고 김 부자에 충성하자는 노래만 울려나왔다.

임씨는 일본에서 북으로 가지 않겠다는 어머니에게 조총련 간부가 했다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자유가 뭔지 알기나 해?” 이때부터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자유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그때까지 살아온 북한은 마음대로 보고 듣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숱한 사람들이 굶어죽어도 북한체제를 욕해선 안 됐다. 외삼촌 두 분이 반동으로 끌려가고 ,두 오빠가 잘못돼도 김 부자를 칭송해야만 했다. 이게 북한에서 허용되는 자유의 실체였다.

암 진단을 받은 임 씨 아버지는 1995년 여름에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 딸이 태어났다. 남편은 “남들이 다 돈을 버는데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며 대학교원을 그만두고 외화벌이(무역)를 시작했다. 모든 직업을 국가에서 정해주는 북한에서는 대학교원을 그만두는 데에도 뇌물을 써야 했다.

어느 날 불쑥 남편은 “여기서는 더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 외화벌이로 돈 좀 벌었다는 사람들 보면 다 잡혀가고 끝이 좋지 않아, 우리 딸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라는 말을 꺼냈다.

그 말에 북한 체제에 대한 염증이 차고 넘쳤던 임씨는 주저함이 없었다. 임 씨와 남편, 갓 태어난 딸과 어머니 4명은 탈북의 길에 올랐다. 1997년 10월이었다.

일본에서 어머니(가운데)와 딸(오른쪽)과 함께 사진을 찍은 임 씨. 2살 때 업고 압록강을 넘었던 딸은 이제는 30살에 가까워지고 있다.



● 대한민국 입국과 하나원 1기
압록강을 거슬러 의주 쪽에 가면 강폭이 좁아 중국으로 걸어 건너갈 수 있는 곳이 있다. 당시는 대량 탈북 사태 이전이라 경비도 삼엄하지 않았다. 경비대에게 돈을 찔러주고 한밤중에 중국으로 건넌 임 씨 가족은 조선족 여성을 만났고, 곧바로 택시를 이용해 대련으로 갔다.

탈북 당시 임 씨 가족의 계획은 가진 돈으로 중국 호구(일종의 신분증)를 산 뒤 식당을 개업하는 것이었다.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사기를 당해 돈을 날리고, 언제든 강제북송을 당할 수 있는 위험에도 노출됐다.

고민 끝에 한국 행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편이 먼저 밀항선으로 한국으로 갔다. 1년 뒤 남편의 노력으로 중국에 남아있던 가족 모두 위조여권으로 장춘공항에서 한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99년 5월 임 씨 가족은 김포공항에 발을 디뎠다. “드디어 대한민국에 왔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오빠들이 그리워하던 자유로운 사회.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슬픔도 밀려왔다.

임 씨가 입국한 그 해 하나원이 생겼다. 그는 하나원 개소식에도 참가했다. 하나원 1기생으로 3개월의 정착교육을 마치고 그해 9월 서울에 21평 규모의 임대주택도 받았다.

2006년 법무사 사무실에 취업했을 때 즈음의 임 씨.



● 법무사 사무실에 취직
이제는 모든 고생이 끝난 듯싶었다. 먼저 입국했던 남편도 잘 적응해갔다. 모란각 본점에 취직해 본점 지배인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듬해 아들도 태어났다. 임 씨도 국가기관 계약직 연구원으로 취직해 수입이 괜찮았다.

식당 경영에 자신감이 붙은 남편은 얼마 뒤 독립해 모란각 체인점 냉면집을 냈다. 손님이 제법 많았다. 장사가 잘 되자 건물 주인이 자기가 직접 장사하겠다며 재계약을 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인근에 새로운 식당을 계약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새 식당을 찾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조급해진 남편은 다른 사업에 손을 댔다 망했다. 이후 방황하기 시작했고, 점점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결국 한국에 온지 7년 만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임 씨에게 한꺼번에 위기가 닥쳐왔다. 계약직으로 열심히 원고를 썼지만 수입은 고스란히 빚을 갚는 데 쓰였고, 생계를 유지하는 일조차 버거웠다. 이때 임씨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을 통해 변호사로부터 법률서비스를 받아 여러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 법무사 자격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생활비에 보탬이 되려고 변호사 사무실 전단지를 돌리던 어느 날 인근 법무사 사무실에서 그에게 직원 채용을 제안했다. 그렇게 2006년 법무사에 취직한 임씨는 일을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갔다. 당시 계약직으로 원고 쓰는 일도 하고 있었기에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자유민주사회의 법을 조금씩 알고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그러다가 끝내 눈에 무리가 와 1년만에 법무사 사무실 일을 접어야 했다.

임 씨가 올해 대한법무사협회 부협장으로부터 법무사 자격증을 수여받고 있다.



● 법무사 시험에 도전하다
눈 치료를 받고 다시 법무사 사무실을 다니게 된 그는 법무사 자격증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대한민국에 온 이상 뭔가 이 사회에 맞는 전문적인 일을 배우고 싶었고, 그렇게 성장하는 엄마의 모습이 어린 자녀들에게도 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2017년 법학원에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법 공부에 나섰다. 법무사가 되려면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부동산법, 공탁법, 민사집행법, 가족관계법 등 8개의 법을 공부해야 한다. 학원설명을 들으며 머리로 이해하려 애쓰는 사이에 진도는 저만치 앞서나가는 일이 반복됐다. 공부는 나름 자신 있다 생각했지만, 나이 탓인지 생각만큼 잘 따라주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늦게까지 홀로 공부하다보니 체력도 부족했다.

반 년을 공부한 뒤 법무사 1차 시험에 응시했다. 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험장 분위기라도 겪어보고 싶었다. 법무사 시험은 8과목 중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이면 과락이고 불합격이다. 첫 시험에서 임 씨가 받은 점수는 8과목 전체 점수를 다 합쳐 40점도 안되는 36점이었다. 참담했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2년에 걸쳐 자신과의 싸움을 거듭했고, 2020년 시험에 응시했다. 가채점을 해보니 합격이었다. 날아갈 듯 기뻤다. 그런데 한 달 후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그의 이름은 없었다.

임 씨는 법원행정처로 달려가 답안지를 확인한 뒤 자신이 허망한 실수를 저지른 사실을 깨닫게 됐다. 1형 시험답안지에 2형이라고 표시하는 ‘체킹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 실수만 아니라면 합격인데 컴퓨터는 야속하게도 그의 답안 절반이 틀렸다고 채점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법원 공무원은 과거 다른 시험에서 체킹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던 판례를 제시하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1년을 더 공부해야 했다.

임 씨가 받은 법무사 자격증.



● 탈북민 최초 법무사
2021년 다시 시험을 볼 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또다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절대 실수하지 말자고 긴장하고 또 긴장했는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그는 북에 있을 때 컴퓨터 채점시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국에 와서도 운전면허 시험 한번 본 것이 전부였다. 1년간의 고생을 또다시 헛되게 만들다는 자책감이 임 씨를 괴롭혔다. “두 번 연속 체킹 실수로 시험에서 낙방한 대한민국의 유일 사례일 것 같다”는 생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2022년 다시 시험에 응시했고, 1차 시험을 통과했다. 당시 합격률은 6.96%였다. 5646명의 응시자 중 393명이 합격한 것이니,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1차 시험 뒤에 다시 2차 시험이 남았다. 1차 시험에 합격하면 2차 시험은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객관식시험인 1차와 달리 2차는 주관식시험이라 외워야 할 것이 훨씬 많다.

임 씨는 다시 자신과의 싸움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치러진 2차 시험에 응시했다. 3개월 후 그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2023년 11월 제29회 2차 법무사 시험에 1차 시험을 통과했거나 또는 시험 면제 허가를 받은 총 753명이 응시해 167명이 합격했다. 이 가운데 여성은 32명에 불과하다. 임 씨가 22.7%의 합격률을 뚫은 셈이다. 6.96%의 장벽을 넘고, 다시 그 장벽을 넘은 사람들과 경쟁해 22.7%에 드는 것은 법무사 시험 응시생 100명 중 고작 1~2명에게만 주어지는 영예다.

임 씨는 합격자 대상 연수를 받은 뒤 올해 5월 10일 법무사 자격증을 받았다. 탈북민 최초의 법무사가 탄생한 것이다.

지난해 찾아가 바닷가에서 멀리 고향 하늘을 바라보는 임윤미 씨.



● 두 오빠를 잃은 40년의 한
“아직 독립하여 사무실을 운영할 준비가 안돼 있습니다. 법무사 자격은 취득했지만 경험도 부족합니다. 연고도 없어 영업이 쉽지 않은데, 10년 동안 함께 해왔던 법무사님이 두 사람 다 서로의 강점을 가지고 있으니 같이 일하면 시너지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시네요.”

합동법무사 사무소 운영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임 씨에게 어떤 법무사가 되고 싶냐고 물어봤다.

“제가 한국에 온지 25년 됐거든요. 북에서도 20년 넘게 살았으니까 서로 다른 남북한 사회에서 각각 절반씩 살아본 셈이죠. 먼저 와서 실패도 해본 탈북선배로서, 법 공부를 한 탈북민으로서 제 경험과 지식이 다른 탈북민들의 한국사회 정착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은 계속됐다.

“그리고 저는 북송교포 2세입니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재일동포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잘 알아요. 일본 친척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좀 살았는데 걸핏하면 기부를 하라, 국가에 충성심을 보여라, 부담주고 감시하고 비위에 거슬리면 잡아갔어요. 한국 사회와는 대조적이죠. 그래서 저는 한국 정부의 탈북민 정착제도와 정착지원 법률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 좋은 사회와 제도에서 우리 탈북민들이 열심히 잘 정착해나갔으면 좋겠어요. 저도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하고 싶고요.”

잠시 말을 멈춘 임 씨는 먼 곳을 응시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6년 넘게 자유 대한민국의 법을 공부하면서 억울하게 잡혀간 외삼촌, 오빠들이 끊임없이 떠올랐어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잡아간 겁니까. 부모님들도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른 채 가슴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저주받은 그 땅에서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아직도 북한에선 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리고 왜 죽어야하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테지요. 북한에서 자유와 인권이 실현되고 한국과 같은 선진적인 사법제도가 정착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임 씨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빠들을 잃은 40년의 한이 눈동자에 맺혔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