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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훈상]대통령 레임덕 앞당기는 ‘집권 야당’ 국민의힘

입력 | 2024-06-13 23:12:00

박훈상 정치부 차장



“바닥 밑 지하실로 내려왔는데 발아래 검은 구덩이가 또 보인다.”

재선의 국민의힘 의원은 최근 무기력한 당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달 초 더불어민주당과 원 구성 협상이 본격화하자 국민의힘 지도부는 “민주당이 18개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독식하면 반드시 역풍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거야(巨野) 독주 심판론’을 주문처럼 외웠다. 22대 총선에서 여당과 민주당 의석수가 각각 108석, 171석으로 63석 차이가 났지만 전국 득표율 격차가 5.4%포인트에 불과하다는 것이 근거였다. ‘막을 수 있는 대안이 있느냐’고 되물으면 “뾰족한 수가 없다”고 했다. 민주당은 10일 밤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를 열고 법제사법위원회와 운영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등 11개 상임위 위원장을 단독으로 선출했다. 본회의장이 ‘민주당 의총장’처럼 보였다.

여당은 여전히 인디언 기우제식으로 ‘거야 심판론’ 공염불만 외고 있다.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의회 독재, 독주의 마약을 맞은 것 같다. 민주당이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거야를 향한 민심의 역풍이 불 기미가 아직 안 보인다. 4년 전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18개 상임위를 독식했을 때 국민의힘은 야당이었다. 집권 여당이 속수무책으로 전부 내주는 것과 다른 것이다. 역풍이 ‘보이콧’만 행사하는 무책임한 여당에 불 수 있다는 당 내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무기력한 여당의 상징은 개원 보름이 지나도록 아직 본회의장에도 못 들어가고 상임위 활동도 해보지 못한 여당 초선 의원들이다. 5일 민주당 등 야당이 우원식 국회의장을 단독 선출할 때 여당 의원들은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에서 항의 집회를 했다. 그날 처음 본회의장에 들어선 민주당 초선 의원들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로텐더홀은 원형 홀을 가리키는 로턴다(rotunda)에서 왔지만 정치권에선 ‘법안(law)을 부드럽게(tender) 처리하자’는 뜻을 담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여당이 본회의장 밖에서 그저 야당 입맛대로 법안을 처리하도록 방치하란 뜻은 아니다. 입법권 없는 여당 특위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한 여당 초선 의원은 “우리가 집권 ‘야당’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민주당은 여당을 패싱하고 대통령실을 직접 상대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여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에 기대려 하고 있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법안의 ‘독소 조항’을 협상할 의지도, 능력도 여당에는 없어 보인다.

여당이 거부권을 ‘뒷배’처럼 믿지만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위태롭다. 한국갤럽이 최근 발표한 윤 대통령의 직무 수행 긍정 평가가 취임 후 가장 낮은 21%였다. 부정 평가는 70%로 취임 후 가장 높게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의 거부권 요청,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되풀이된다면 민심이 누구 편을 들겠나.

대통령 단임제 국가에서 임기 말 레임덕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지금은 집권 3년 차, 한창 일할 때다. 대통령 지지율이 이대로 간다면 대통령의 영(令)이 서지 않고 공직 사회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남은 대통령 임기가 잃어버린 3년이 될 수 있다”는 한 정치학자의 경고가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여당의 무기력증이 우리 삶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박훈상 정치부 차장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