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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인간 본성 파헤친 전쟁 회화… 근대 미술의 門 열어

입력 | 2024-06-14 03:00:00

[스페인 미술거장 명작을 만나다]〈2〉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佛에 의해 학살당한 마드리드 시민
영웅적 모습-비극적 결말 함께 담아
마네-피카소의 그림에도 큰 영향… 프라도 미술관 “고야, 사상가적 면모”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한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나폴레옹 전쟁 때 침입해 온 프랑스군을 마드리드 시민들이 죽이자 다음 날 벌어진 보복 처형을 그렸다. 프라도미술관 제공



1808년 5월 스페인 마드리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침략과 보복이 가득한 아수라장이었다. 5월 2일에는 스페인으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시민들이 무참히 죽였고, 다음 날 프랑스군은 마드리드 시민 수백 명을 학살한다. 6년 뒤 스페인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두 날 일어난 일을 대형 회화 두 점으로 남겼다.

고야의 작품을 오마주한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 중 프랑스군의 시민 학살을 그린 ‘1808년 5월 3일’(5월 3일)은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안의 처형’으로,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 ‘게르니카’에 영향을 주며 프라도 미술관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그 이유는 고야의 ‘5월 3일’이 역사 속 사건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라도 미술관의 큐레이터 구드룬 마우러는 이 그림을 “인간 본성에 관한 탐구”라고 설명했다.

● 그림 속 이중적 의미

‘5월 3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흰옷을 입고 두 손을 들어 올린 남성이다. 남성의 포즈와 하얗게 빛나는 옷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첫눈에는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영웅처럼 묘사한 것으로 읽힌다. 마우러는 “예수상은 스페인에서 아주 중요한 이미지였기에 그림을 본다면 누구나 이 남자가 예수에 빗대어 그려졌음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종교화 같지 않은 요소도 있다. 마우러는 “종교화에서는 항상 신의 빛, 천사, 신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에는 없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남성을 비추는 빛은 신이 있는 하늘이 아닌 바닥의 등불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또 그림 오른쪽 뒤에 보이는 교회는 불이 꺼진 채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인다.

“이를 통해 고야가 분명히 하는 것은 이 사람이 곧 총에 맞아 죽게 된다는 것. 그 죽음 뒤에 구원은 없을 것이고 그저 비극적인 종말이 결론이라는 점입니다. 이 인물은 ‘순교자’가 아닌,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희생자’인 것이죠.”

프라도 미술관에서 18세기 스페인 미술을 담당하는 큐레이터 구드룬 마우러. 프라도미술관 제공

구드룬의 이러한 설명은 그림 왼쪽 아래 피를 흘리며 참혹하게 죽어 나간 사람들, 또 그 시신 옆에서 무언가를 가져가고 있는 듯한 희미한 여인의 모습을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즉, 고야는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에서 죽어간 시민들의 영웅적 모습과 비극적 결말을 한데 엮어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마우러에 따르면 이러한 복합적인 구조는 또 다른 그림 ‘1808년 5월 2일’(5월 2일)을 함께 보면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5월 2일’은 표면적으로는 마드리드에 쳐들어온 프랑스군에 용감히 맞서 싸운 시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 역시 자세히 보면 잔혹함이 가득하다. 마우러는 “5월 3일에서는 프랑스군이 얼굴 없이 기계처럼 민간인을 쏘고 있다면, 이번엔 스페인 사람들이 끔찍하고 폭력적으로 묘사된다”고 했다.

이미 칼에 맞아 쓰러져 말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다시 한번 찌르려 하는 남자, 또 이 남자와 같은 표정을 하는 프랑스군.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은 국가 간의 전쟁을 넘어 인간 본연의 폭력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고야는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되묻고 인간의 마음속 어두운 곳을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고야는 4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평생 궁정화가로 지내며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계몽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을 즐겨 읽었다. 그러면서 20세기 철학자,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무의식과 자아를 언어로 표현하기 전 시각 언어로 먼저 나타내 “근대 미술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우러는 “두 작품 외에도 고야는 전쟁을 다룬 판화를 통해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폭로하는 작품을 여러 점 남겼다”며 “이러한 사상가적 면모는 19∼20세기 프랑스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재발견됐고, 이를 계기로 고전 미술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고 했다.



마드리드=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