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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해리 포터’ ‘날씨의 아이’… 신화의 변주는 끝이 없네

입력 | 2024-06-15 01:40:00

해리 포터-볼드모트 관계성엔 숙적 아테나-메두사 그림자가
대중문화 속 신화적 요소 분석, 영화-애니 등 인문학 깊이 더해
동서양 아우르는 원문 소개… 신화 구조도 알기 쉽게 정리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신화에서 시작되었다/오키타 미즈호 지음·이정미 옮김/260쪽·1만7800원·포레스트북스




신화 알고 나면 더 재미있는 영화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에서 주인공 해리 포터(오른쪽)와 볼드모트가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다. 영혼을 찢어 보관하는 호크룩스로 영생을 누리려는 볼드모트의 마지막 호크룩스는 다름아닌 해리 였다. 고대 신화에서도 해리포터와 같은 숙적과 주인공의 ‘일체화’를 엿볼 수 있다. 미디어캐슬 제공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책이자 영화인 ‘해리 포터’의 주인공 해리 포터와 숙적 볼드모트의 악연은 조금 특별하다. 볼드모트는 훗날 자신에게 위협이 될 해리를 죽이려 하지만 어머니 릴리의 희생으로 해리는 살아남는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볼드모트의 영혼 일부가 해리에게로 붙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해리는 볼드모트가 사용하던 뱀의 언어를 쓸 수 있게 되고, 볼드모트는 육체를 부활시키기 위해 해리의 피를 사용한다. 주인공이 적과 한 몸이 되는 일종의 ‘일체화 현상’이다.

일본 와코대 교수인 신화학자가 쓴 신간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이야기들’의 근원을 신화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인도, 일본,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등 동서양을 막론한 신화 텍스트가 풍부하게 포함돼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저자는 신화에서도 ‘해리 포터’ 속에서와 같은 일체화 현상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전쟁의 신 아테나는 영웅 페르세우스를 앞세워 뱀 형상의 괴물 메두사를 물리쳤지만 사실 아테나를 표현한 작품에서 그녀의 옷소매가 전부 뱀으로 장식될 만큼 뱀과 연관이 깊다. 인도 신화 마하라바타 속 영웅 아르주나도 숙적이자 형 카르나처럼 활 솜씨가 뛰어나다는 동질성을 갖는다. 증오하는 존재를 오래도록 바라보게 되는 모순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오래도록 자리 잡아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신화를 알면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을 보면서도 인간의 본질을 곱씹을 수 있다. ‘귀멸의 칼날’은 목을 베어야만 죽는 ‘혈귀’와 이에 맞서는 인간의 싸움을 그린다. 그런데 둘의 대립은 바나나 나무와 돌이 인간의 조건에 대해 입씨름을 벌이는 내용의 인도네시아 신화를 연상시킨다. 몸이 부드러운 바나나는 금방 썩는 대신에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지만, 돌은 영생을 누리는 대신에 가족을 만들 수 없다. ‘귀멸의 칼날’에서 불멸하지만 따뜻한 유대를 느낄 수 없는 혈귀를 보다 보면 인간 주인공들의 끈끈한 사랑에 대한 감흥이 더욱 커진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날씨의 아이’에서 주인공 무녀 히나가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모습. 히나의 희생으로 홍수가 멈추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소년 호다카가 히나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오며 일본 일부가 물에 잠긴다. 저자는 이는 신들이 세상에 내린 홍수를 한 인간이 배를 만들어 피하는 메소포타미아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튼 것으로 분석한다. 미디어캐슬 제공

또 저자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유명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는 메소포타미아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한다. 신화에서는 폭풍의 신 엔릴 등이 세상에 거대한 홍수를 내리지만, 지혜의 신 에아에게서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인간 우트나피쉬팀은 배를 만들어 6일 밤낮으로 쏟아지는 폭우를 피한다. 반면 ‘날씨의 아이’에서는 기도하면 비를 멈출 수 있는 무녀 히나가 제물로 희생돼 홍수가 잦아들지만 소년 호다카가 그녀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오면서 저지대가 물에 잠기게 된다. 폭우가 그친 ‘길가메시 서사시’와 정반대의 결말로 신화를 비튼 것이다.

원전 텍스트 외에도 신화 구조나 체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 신화학에 대한 기본 지식도 넓힐 수 있다. 가령 신화의 ‘3기능 체계’에 따라 각종 사건과 인물들은 1기능(신성), 2기능(전투력), 3기능(풍요)에 따라 구조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트로이 전쟁을 촉발시킨 파리스에게 여신 헤라는 권력을, 아테나는 전쟁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물하겠다고 모습을 드러낸 게 대표적인 예다.

신화는 죽은 이야기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는 ‘살아 숨쉬는 이야기’다. 신화란 프리즘을 통해 지금의 콘텐츠들을 더욱 깊이 있게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책이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