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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조은아]영국의 ‘잃어버린 14년’

입력 | 2024-06-16 23:12:00

조은아 파리 특파원



다음 달 4일(현지 시간) 영국 총선은 14년간 집권한 보수당의 패배로 끝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심지어 최악의 참패가 예견된다. 이달 12∼14일 진행된 한 지지율 조사에서 야당 노동당은 46%를 얻은 반면, 보수당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21%에 그쳤다. 미국 정치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보수당은 전체 하원 650석 중 71석만 차지할 수도 있다. 직전 총선인 2019년 365석과 비교해 5분의 1도 안 된다. 이러다 보니 영국에선 ‘보수당이 선거 멸종(electoral extinction)에 직면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게 다 브렉시트 때문’ 불만 고조


현 상황은 190년 역사를 지닌 보수당을 상징하던 윈스턴 처칠이나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봤다면 뒷목을 잡을 일이다. 위기 때마다 나라를 굳건히 이끌던 보수당이 어쩌다 이리 망가졌을까.

현지에선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가 결정적이었단 의견이 중론이다. 2020년 팬데믹 봉쇄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치며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이게 다 브렉시트 때문’이란 불만이 늘어났다. 보수당이 브렉시트로 기업들 발목을 잡아 경제 위기를 제대로 타개하질 못하고 있단 얘기다. 영국 국립사회연구센터 조사에 따르면 최근 브렉시트 찬성 비율은 24%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인 2016년 찬성률(41%)의 반 토막 수준이다. 브렉시트가 경제, 이민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인식이 과거보다 늘었다.

2016년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는 브렉시트를 국민투표로 띄우며 “난 EU에 잔류하길 원하지만 국민에게 선택권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속내는 지지층 결집을 위한 전략이었다. 브렉시트를 주창하는 극우 독립당이 노년 보수층 표를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권자들은 브렉시트를 시급한 현안으로 보지도 않았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브렉시트 과정을 되짚은 기사에서 “국민투표 이전 조사에선 대중이 브렉시트를 우선적 문제로 삼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결국 표가 급한 정치인들이 브렉시트를 이용해 대중을 동요시켰던 셈이다.

보수당의 실책으로 국민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컸다. 런던시는 “올해 초 영국이 EU 탈퇴 이후 경제 규모가 6% 감소했으며, 2035년 10%까지 감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영국 상공회의소가 2022년 말 사업체 1168곳을 대상으로 벌였던 설문조사에서도 약 77%가 ‘브렉시트가 매출 증대나 사업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실제로 2019년 이후 영국의 상품 수출입 증가율은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낮았다. 청년들은 EU 국가로 취업이 어려워졌다고, 소비자들은 통관이 복잡해져 마트에 진열된 품목이 줄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보수당의 또 다른 패착은 근시안적으로 인기에 집착하면서 장기적인 국가 과제엔 소홀했다는 점이다. 보수당 집권 이후 내각은 꾸준히 투자하고 설계해야 할 연구개발(R&D)과 교육, 기업 투자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 블룸버그통신은 “보수당 내각은 금융위기 이후 긴축정책을 폈는데, 이로 인해 공공투자가 불안정해져 기업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R&D 등 장기 과제 투자엔 소홀


더 심각한 건, 이런 장기적 정책 오판은 후대로 갈수록 더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보수당 집권 14년 동안 영국이 겪은 ‘잃어버린 14년’이 앞으로 몇십 년 이상 이어질 거란 전망도 나온다. 영국의 현실은, 정부가 정치적 실리만 따져 정책을 추진하면 그 실패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역풍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일깨운다. 우리 역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