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안전관리자 정민수 씨의 그날 밤 이야기
지난 3월 31일 새벽 3시 40분경 경기 시흥시 신천동 한 사거리에서 음주운전 차량이 정차한 쓰레기 수거 차량을 들이받은 뒤 피해자를 매달고 도주하는 모습. 뒤에서 정민수 씨(가명)가 운전해 쫓아가고 있다. 경기남부경찰청 제공
지난 3월 31일 어두컴컴한 새벽, 경기 시흥시 신천동 한 사거리를 지나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길가에 서 있던 쓰레기 수거 차량을 들이박았다. 가해자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차를 요리조리 움직였다. 피해 차량 기사가 SUV로 다가와 대화를 시도하자, 가해자는 슬금슬금 속도를 올렸다. 이어 그대로 조수석 창문에 피해자를 매단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은 당시 차를 몰며 인근을 지나던 30대 안전관리자 정민수 씨(가명)의 눈에 들어왔다. 정 씨는 대전에서 자격증 시험을 마치고 자택이 있는 시흥시로 올라오던 중이었다. 지인을 근처에 내려주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사람이 차량에 매달린 걸 목격하고 위험한 상황임을 직감했다.
가해 차량이 피해자를 창문에 매단 채 도주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경찰청’ 영상
가해 차량을 쫓아가는 정민수 씨(가명). 유튜브 채널 ‘경찰청’ 영상
정 씨는 지인 A 씨를 그곳에 내려주며 피해자에 대한 구호조치를 부탁했다. 정 씨와 마찬가지로 안전관리자인 A 씨는 119에 신고한 뒤 병원까지 피해자를 인계했다. 당시 피해자는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상태였지만, A 씨는 “혹시 모르니 병원 가자. 가서 검사 다 받아보셔야 한다”고 설득했다.
가해 차량에 매달려있던 피해자가 땅으로 떨어졌다. 유튜브 채널 ‘경찰청’ 영상 캡처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가해자가 차를 버리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정 씨도 차에서 내려서 뛰었다. 소방서를 지나고 개천을 따라 1㎞ 정도 달렸다.
그러던 중 가해자가 아파트 담벼락을 넘으려고 시도했다. 정 씨는 “이때 조금 웃겼다. 흉기 같은 게 없으니까 저렇게 필사적으로 달리나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담을 넘으려던 가해자가 넘어지자 정 씨도 담에서 내려와 다시 쫓았다.
가해자와 1m 정도 간격을 두고 계속 달렸다. 직접 가해자를 붙들진 않았다. 정 씨는 “혹시 제가 상대방을 잡았다가 상대방에게 상처가 생기면 폭행으로 역고소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가해자를 검거했다. 당시 가해 남성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 수준(0.08%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가해 남성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도주치상), 도로교통법 위반(사고 후 미조치∙음주운전) 등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검찰에 송치했다.
가해자가 경찰에 검거됐다. 유튜브 채널 ‘경찰청’ 영상 캡처
7년째 안전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정 씨는 “직업의 주목적이 사고 예방이다 보니까 누구 하나 다치면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진다”며 “이번 사건에서 크게 다친 분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이어 “사실 뉴스에 다 안 나와서 그렇지 아파트 현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다치는 분이 많다. 안전관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하시는 분들도 따라 주셔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법을 만들어 놨는데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나”라고 강조했다.
경찰이 음주운전 차량을 잡은 정민수 씨(가명)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시흥경찰서 제공
이어 “언론사 인터뷰를 해도 한두 개나 방송에 나오겠지 생각했다. 나중에 가보로 남기자는 생각이었다”면서 “너무 크게 이슈가 돼서 조금 당황스럽다. 유튜브에 음주운전자 잡는 시민들 영상이 많이 올라오는데 그분들이 더 대단하시다. 저는 뭐 특출나게 한 것도 아니고, 크게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가해 차량이 속도가 빠른 차종이었으면 못 따라갈 수도 있었다. 제 차량과 속도가 비슷하게 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서 잡을 수 있던 거로 생각한다”며 겸손해했다.
그러면서 “기사가 난 뒤 초·중·고등학교 친구들한테 갑자기 전화가 온다. 동창회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음주운전 차량을 추격해 잡은 정민수 씨(가명).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이어 “인생은 혼자 살 순 없더라. 누군가는 도와주고 끌어주고, 누군가는 밀어줘야 한다. 채찍질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근을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저희 현장에 있는 안전관리자들은 ‘안전’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굉장히 잘 뭉친다. 현장에서도 채찍을 주는 사람이 있고 당근을 주는 사람도 있다”며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살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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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