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당 대표 경선에 나선다. 23일 경선 출마 선언을 할 모양이다. 4·10 총선에서 국힘이 참패한지 두 달 반 만에 선거 패장(敗將)이 다시 그 당을 이끌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대한’(어차피 당 대표는 한동훈) 소리가 분분하다. “어대한은 당원 모욕”이라고 ‘찐윤’ 이철규 의원은 공개저격했다. 어차피 나오고 안 나오고는 한동훈의 자유이고 정치적 결단이다. 작년 12월 비대위원장을 맡을 무렵에도 그가 왜 꼭 그 때 그 자리에 서야 하느냐는 논란이 적지 않았다.
“강감찬 아꼈다 임진왜란 때 쓸 요량이겠지만 고려가 망하면 조선도 없다. 당연히 임진왜란도 없다”고 나는 그때 신문칼럼에 썼다. “국힘이 총선에서 지면 대통령도 제 역할 못 한다”며 ‘관건은 용산’이라고도 지적했다. 일종의 ‘글빚’ 때문에 한동훈이 또 나온다는 지금 가만있을 수 없다. 이번 당 대표 출마, 나는 반대다.
이유는 첫째, 패장이어서다. 강감찬은 1019년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에 대승을 거둬 나라를 구했지만 국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 한동훈은 보수 궤멸에 가깝게 참패했다. 물론 그에게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으나 총선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대통령 지지도다. 이번 역시 정권 심판론이 먹혀들었다. 한동훈이 아니었다면 더 크게 졌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한동훈에게 두 번째로 큰 책임이 있음은 부인 못한다. 심지어 그 자신이 패배 다음날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해놓고 석달도 안 돼 다시 나서는 건 ‘책임 정치’라 할 수 없다. 패장은 깨끗이 물러나고 다음 지도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정치적 도리다. 2020년 총선 패장 황교안도, 2016년 김무성도 그랬다. 1997년 대선에서 패한 이회창 대통령 후보도 1년 반이 지나서야 당 총재로 복귀했다. 2004년 총선 패배 직후 박근혜 당 대표가 나오긴 했으나 그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따른 괴멸적 참패를 막은 경우였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총선 다음날인 4월 11일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안다. 이런 정치문법을 깬 야당 지도자가 있다는 걸. ‘민주당의 아버지’라는 이재명이 대선 패배 두 달 만에 보선 금배지를 달았고 다섯 달여 만에 당 대표까지 됐다. 그러나 그건 이재명 사법리스크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다. 자숙과 자성이라는 잠깐의 책임지는 시간도 마다하는 패장이 ‘뉴노멀’이 될 순 없다. 그걸 본받아서야 설령 한동훈이 당 대표가 된들 어떻게 이재명의 무책임 정치, 뻔뻔한 뉴노멀을 비판할 수 있겠나.
한동훈에 반대하는 두번째 이유는 정치력 결핍 때문이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긴다 해도 일단 한동훈이 책임을 맡았으면, 대통령과 담판을 해서라도 전략을 짜내야 했다. 지지층이 기대했던 것도 1987년 6·29선언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모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윤 대통령의 가장 큰 리스크는 부인 문제다(물론 채 상병의 억울한 죽음과 특검 문제도 시시각각 목을 조여 오겠지만 그건 자업자득이다). 대통령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 브랜드’를 우습게 만들면서 용산과 국민 사이를 찢어놓는 건 우리시대 비극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총선 총괄선대위장 한동훈은 김 여사 디올백 문제부터 풀고 넘어가야 했다. 사과 없이 선거 못 치른다는 소리가 빗발치는데도 한동훈은 “아쉬운 점, 국민이 걱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1월 18일)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19일) 발언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몽둥이는 대통령이 들었다. 한동훈은 비대위원장 사퇴 요구를 거부하며 맞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게 끝이다.
차라리 약속대련이면 좋았을 거다. 한동훈은 제2의 6.29선언을 연출해 ‘아름다운 뒤통수 치기’는커녕 23일 충남 서천시장에서 대통령께 90도 폴더인사를 바침으로써 김 여사 문제를 덮고 말았다. 그랬던 한동훈이 다시 당 대표가 된다고 윤 대통령에게 할 말 할 수 있겠나. 아직도 살아있는 김 여사 리스크를 풀 수 있는가.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1월 23일 화재가 발생한 충남 서천 특화시장에서 현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 동아일보 DB
● 팬덤과 유세뽕에 넘어갈 텐가
그럼에도 한동훈이 당 대표에 나서는 건 팬덤까지 형성된 지지율 덕분일 터다. ‘장래 정치 지도자’를 묻는 갤럽 여론조사에서 한동훈은 2022년 9월부터 지금까지 보수우파 측 대통령감으로 부동의 1위다(전체적으로 보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위. 21일 조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36%,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35%, 이재명 33%, 한동훈 31%로 나온 것은 ‘정계 인물 호감도’였다). 가히 국민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함직하다.
한동훈이 나서면 안 되는 세 번째 이유가 그 팬덤 때문이다. 잘 자란 강남 8학군 ‘엄친아’(엄마친구 아들) 73년생 한동훈은 그래서 70대와 60대, 직업별로는 가정주부 사이에서 제일 인기많다. 머리 회전과 말이 빠른 초(超)엘리트라고 자신해선지 남의 말을 안듣는다고 한다(윤 대통령이 대화의 90%를 점한다면 한동훈은 95%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면서도 총선 유세는 여의도 전철역처럼 쎄한 곳 아닌 시장통 같은 사람 많은 데를 주로 찾았으니 ‘유세뽕’을 잊지 못해 또 나서는 게 아닌가.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3월 27일 인천 미추홀구 인하 문화의거리를 방문해 시민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 동아일보 DB
물론 우리도 선진국이 된 마당에 고난의 서사에서 감동받는 촌스러움은 벗어날 필요가 있다. 쿨하고 똑똑한 정치인이 대선에서 패하고도 주식투자나 하는 철면피 정치인보다는 낫다고 본다. 그러나 적과의 동침은커녕 동료시민들과 밥도 잘 안 먹는 깔끔함으론 사람을 모을 수 없다. 패장이 방방곡곡 민생투어도 아니고, 소외지역 법률상담도 아니고, 서초구 공공도서관에서 핑크빛 골전도 이어폰 끼고 책이나 보는 모습이 셀피처럼 찍혀 퍼진 것은… 얄팍하다.
● 웰빙당을 이기는 정당으로?
기어이 당 대표에 나설 결심인 한동훈이 윤 대통령에게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전화로 말했다고 한다. 헹. 비대위원장 때 못 만들어 물러났던 패장이(제1 책임자는 아니라고 앞에 썼다) 이제 와 무슨 수로?
명색이 집권당으로서 총선 참패를 했으면, 다그리 국회 들어가 쌈닭처럼 물어뜯어도 모자랄 판이다. 문재인 정권 시절 임대차3법을 밀어붙이는 다수여당에 맞서 윤희숙 당시 국힘 의원이 “저는 임차인입니다” 연설로 감동을 줬듯,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국힘은 폭망 뒤 의총을 열어도 점심 시간 전 칼같이 끝내는 웰빙귀족정당 본색을 드러냈다(세비 반납하라. 혈세가 아깝다).
더구나 대통령 의중은 명백하다. 친윤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20일 ‘당정일체’를 내걸고 전격 당 대표 경선 출마를 밝혔다. 윤 대통령은 여당 장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감히 김 여사를 물어뜯으려 했던 한동훈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 “대통령 부부도 법치 예외 될 수 없다”
차라리 잘 됐다. 이로써 한동훈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분명히 색깔을 드러낼 수 있게 됐다. 23일 경선 출마 때 김 여사와 채 상병 문제 처리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따라…” 정도로 답해선 , 기대만 무너뜨릴 뿐이다. 민심이 당심이고 그것이 윤심이어야 한다는 짱짱한 반골 체질을 드러내야 한다. 윤 대통령의 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바로잡는 ‘반(反)부패’가 한동훈의 브랜드이길 바란다.
대통령 부부도 법치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선명한 차별화로 당 대표가 된다면, 한동훈은 이명박 정부 때 박근혜 같은 ‘정권 교체’를 내걸고 정권 재창출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친윤 후보에 밀려 떨어진다면, 더욱 잘 됐다. 한동훈은 ‘여당 내 야당’ 역할로 정치력을 길러 정권 재창출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8월 법무부 장관 시절 신임검사들과의 강화를 기억하는가. 한동훈은 “검사로서 인생이 초라해지는 건 뭐냐면, 소신을 가지고 내가 관철했는데 답이 틀렸을 때”라고 했다. “기회는 여러번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굉장히 잘 준비하고 실력을 갖추는게 그만큼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정치인은 더욱 그렇다. 한동훈은 굉장히 잘 준비하고 실력을 갖추었는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