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테니스협회는 23일 제28대 회장 보궐선거를 진행했다. 왼쪽부터 소재무 선거관리위원장, 주원홍 회장, 손영자 전 회장 직무대행. 사진 출처 테니스 코리아 홈페이지
테니스협회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테니스장에서 제28대 회장 보궐선거를 실시한 결과 주 고문이 전체 166표 가운데 79표(47.6%)를 얻어 당선됐다”고 23일 발표했다.
이로써 주 고문은 제26대 회장을 지낸 2013~2016년에 이어 두 번째로 테니스협회장을 맡게 됐다.
여기까지는 여느 스포츠 종목 단체 회장 선거 기사와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대한체육회가 이 선거 결과를 인정할지 아직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대한체육회는 이번 선거 기간 테니스협회에 두 차례 선거 중단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체육회는 ‘관리 단체 지정 유예 기간이 다 지나지도 않은 시기에 체육회와 상의 없이 회장 선거를 재개하는 건 회원 종목 단체 규정 등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기 구리시 갈매동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테니스 코트. 구글 어스 캡처
조금 더 정확하게는 육군사관학교 테니스 코트를 리모델링한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주 회장과 양종수 당시 육군사관학교장, 박영순 당시 구리시장은 육사 내에 있는 코트를 리모델링한 뒤 이를 테니스 동호인들에게도 개방하기로 뜻을 모았다.
테니스 동호인들이 늘 코트를 찾아 헤매는 상황에서 경기 구리시 갈매동에 있는 30면(클레이 코트 14면, 하드 코트 16면)짜리 육사 코트를 생도에게만 개방하기는 아깝다고 판단했던 것.
문제는 테니스협회에는 이 사업을 진행할 예산이 없다는 점이었다.
육사 코트는 실내 코트까지 갖춘 형태로 리모델링을 마친 뒤 2015년 12월 9일 준공식을 열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테니스협회 관점에서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주 회장이 연임에 실패하면서 격랑이 일기 시작한다.
2018년 국정감사 당시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채널A 화면 캡처
곽 전 회장은 미디어윌에 육사 코트 운영권을 주는 건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며 테니스협회에서 이 코트를 직접 운영하기로 방침을 바꾼다.
이에 미디어윌은 그러면 테니스협회가 리모델링 비용 30억 원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곽 전 회장 임기 내내 법정 싸움과 이 사태를 둘러싼 ‘장외전’이 이어진 끝에 법원은 테니스협회가 60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며 미디어윌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따라 테니스협회는 사실상 파산 상태가 되면서 국가대표 후원금을 받아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식물 협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곽 전 회장은 결국 제28대 회장 선거에서 낙선하며 “2018년 국정감사 때 안민석에게 ‘테니스 듣보잡’이라고 불린 사람”이라는 타이틀만 얻은 채 테니스협회를 떠나야 했다.
곽 전 회장과 주 회장을 물리치고 회장에 당선된 건 정세균 당시 국회의장 친동생인 정희균 전북테니스협회장(57)이었다.
정 전 회장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이자 15억5000만 원은 3년에 걸쳐 나눠 갚고 원금은 육사 코트 운영권을 넘겨주는 걸로 마무리하기로 미디어윌과 합의를 맺었다.
주원홍 당시 미디어윌 고문(왼쪽)와 정희균 당시 대한테니스협회장. 대한테니스협회 제공
미디어윌은 테니스협회에 곽 전 회장 체제의 ‘전횡’을 지적하는 조사 보고서를 만들어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해 달라고 요청했고 정 전 회장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테니스협회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걸림돌은 또 있었다.
육사 코트를 리모델링하기로 하면서 테니스협회와 육사가 맺은 계약서에는 “본 계약과 관련한 일체의 권리 의무(채권, 채무 등)를 양도하거나 담보물로 이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에 따라 빚을 갚는 용도로 코트 운영권을 넘기는 건 계약 위반이었다.
결국 테니스협회와 미디어윌이 맺은 계약서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협회가 갚아야 하는 빚도 차곡차곡 쌓여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정 전 회장이 테니스협회 이름으로 받은 후원금과 국제대회 광고 수익 일부를 용도와 다르게 썼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정 전 회장은 결국 지난해 9월 6일 자진사퇴했다.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동아일보DB
이때 대한체육회에서 ‘빚 때문에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회장을 뽑아서는 안 된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대한체육회는 이후에도 테니스협회를 ‘관리 단체’로 지정하겠다고 압박했다.
한마디로 ‘테니스인들은 빚만 질 줄 알지 협회를 운영할 능력이 안 되니 우리가 직접 운영을 맡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미디어윌은 ‘테니스협회가 관계 개선 의지를 보여준 만큼 46억1000만 원에 달하는 미 상환금 전액을 탕감하겠다’고 밝혔다.
손 직무대행은 대한체육회 이사회 하루 전인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께서 빚만 청산하면 테니스협회장은 누가 돼도 좋다고 하신 만큼 이번 채무 탕감으로 이 회장께서 약속을 지켜주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체육회도 관리 단체 지정을 1개월 유예하며 한발 물러섰다.
대한테니스협회 로고.
주 회장은 “이제 협회를 이끌게 된 만큼 대한체육회와 잘 협의해 문제를 풀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선거를 하면 관리 단체 지정 사유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를 뽑아주신 선거인단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선거가 2015년부터 시작된 이 사태에 ‘끝의 시작’이 될지 ‘시작의 끝’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서로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테니스협회가 두 손 두 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테니스가 건국 이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은 20일 스포츠 시스템 개혁 의지를 밝히면서 “(한국 스포츠가) 협회를 위한 시스템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테니스협회가 이 모양이었는데, 일부 ‘엘리트 테니스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한국 테니스의 위기를 논하지 않았다는 게 이 사태의 본질을 아니었을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