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 스페셜] 옥산실록(장씨천년대동사)
저자 장석진 씨
‘옥산실록(장씨천년대동사)’ 저자 장석진 씨는 사성사관(賜姓賜貫, 임금이 공신에게 성과 본관을 하사하는 것) 등의 역사를 발굴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웠다. 저자는 조선조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인 영산군-장한공(張漢公)의 직계 후손으로, 사책과 문헌을 추적해 장씨 인물의 역사를 모아 족보와 대조해 책으로 펴낸 것이 옥산실록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저자의 의견이다.
한국 족보는 문중의 혈통을 적은 책이나 당쟁과 장삿속이 스며들어 가보에서 파보와 족보와 대동보로 합치는 과정에서 협잡꾼들이 야합한 ‘비리의 백화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보를 처음 만든 사람은 양촌 권근의 아들 권제로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고려사 편수를 맡겼더니 보태고 깎은 것이 많을 뿐 아니라 고려 태조 공신(권행)을 시조로 삼은 것이 발각돼 죽은 권제의 시호와 벼슬을 추탈했다.
영산군에 추봉된 장한공은 본관이영산임에도 구례 장씨와 안동 장씨와 진안 구례 장씨와 구미 인동 장씨 족보에서 명의를 도용했고 한국민족대백과사전과 부천시사에서 안동 장씨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항의했더니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는 장한공을 아예 책에서 빼버렸으니 학문 기관인지 의심스럽다.
사극은 장희빈을 악녀로 묘사했으나 당쟁의 제물이다. 궁 안의 최무수리와 최무수리의 여동생을 첩으로 삼은 노론의 김춘택이 내통해 갖은 모사를 꾸며서 장희빈을 몰아냈는 데도 영조 때까지 장희재 아들 장휘, 장종경, 장차경 3형제를 수배해 씨를 말렸다.
일제 때 장윤동이 장희재 후손을 가장해 불광동의 수만 평 땅을 가로채고 1974년에는 묘지 보상금조차 그 족속들이 가로챘다. 의성의 장병화는 칠곡군 인동면의 신 인동 장씨로 투탁(投託)한 후 서울 장씨대종회에 침투해 보안사 위세를 악용해 시조 장정필을 추방함으로써 장씨의 역사를 유린했다.
위 내용은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을 획득한 것으로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저작권 신탁을 마쳤다.
태현지 기자 nadi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