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랩: 돈의 덫에 걸리다 <3> 플랫폼 사채 총책의 ‘사냥법’
“93××××입니다.”
5월 29일 춘천지방법원 102호 법정. 피고인 박성훈(가명)은 판사의 물음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갈색 수의(囚衣)를 입고 있었다. 형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날은 박성훈의 항소심 첫 재판이었다.
생년월일과 주소를 확인한 후 박성훈은 피고인석에 앉았다. 양옆의 공범들보다 앉은키가 주먹 하나만큼 작았다. 볼은 폭 들어갔고 피부는 푸석했다. 박성훈의 변호인은 양형 부당 등을 항소 이유로 들었다. 그는 앞서 2월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봄까지 그는 불법사채 조직의 총책 ‘강 실장’이었다. 강 실장 조직은 2021년 2월부터 장사를 했다. 뒤를 봐주는 폭력조직이나 전주(錢主)는 없었다. 강 실장을 수사한 경찰은 “젊은데도 돈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수를 꿰뚫고 있었다”고 했다.
경찰이 압수한 강 실장 조직의 대포통장에는 피해자 1000여 명을 대상으로 1000억 원대 불법사채를 굴린 흔적이 나왔다. 지난해 3월 붙잡혔을 때까지 강 실장이 챙긴 것으로 의심된 범죄수익은 약 300억 원이다. 하지만 추징이 명령된 돈은 6억6635만 원에 그쳤다.
‘강 실장’ 조직의 총책은 평범한 외모의 서른한 살 청년이었다. 강 실장 박성훈(가명·가운데)이 지난해 3월 서울 서초구에서 경찰에 검거될 당시 모습. 강원경찰청 제공
박성훈의 이중생활은 피해자 신고로 2017년 경찰에 검거되면서 막을 내렸다. 압수수색 당시 그의 집에선 일본 사채업계를 다룬 만화책 ‘사채꾼 우시지마’가 나왔다. 그에겐 대부업법 위반뿐 아니라 범죄단체 조직 혐의가 적용됐다. 박성훈은 정식 대부업체를 운영했을 뿐인데 일부 직원이 불법을 저지른 거라고 잡아뗐다.
“저는 등록증이 뭔지도 몰랐어요. 관공서에서 발급해 주는 거니, 불법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강 실장 조직이 ‘던지기’ 방식으로 현금을 주고받았던 강원 원주시 중앙고속도로 인근의 한 인적 드문 굴다리.
현금을 나를 땐 강 실장이 정한 규칙을 철저히 따라야 했다. △폐쇄회로(CC)TV가 없는 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하기 △누구와도 잡담하지 않기 △퇴근할 때도 거처에서 3km 이상 떨어진 곳에 주차하기. ‘안전운전’도 수칙 중 하나였다. 조직원의 안위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현금을 옮길 때 대포차를 사용했는데, 교통사고가 나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직은 점조직으로 설계했다. 콜팀은 피해자의 연락처만 수집했다. 상담팀은 대출 계약을 맺고, 수금팀은 빚 독촉을 담당했다. 인출팀은 현금 출금을, 수거팀은 현금 배달을 맡았다. 조직원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섬처럼 각자 맡은 일만 처리했다. 이건 민 실장 때도 써먹었던 방식이다. 과거 항소심 재판부가 “매우 이례적인 방식”이라고 평가했던, 검증된 방식이었다.
달라진 건 강 실장 스스로 조직원의 한 명으로 위장한 것이다. 강 실장 조직에서 1년 넘게 일한 조직원은 취재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 실장은 목소리만 알았어요. 가끔 ‘자기 위에 누가 있다’고도 했어요. ‘실장’이었으니 그 말을 믿었죠. 그가 총책이라는 건 붙잡히고야 알았습니다.”
경찰이 압수한 강 실장 조직의 대포폰 등 범행 장비. 신입 조직원이 들어오면 업무 연락은 반드시 대포폰을 사용하도록 철저하게 교육했다. 강원경찰청 제공
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 수금팀 조직원은 2년 전 친구 소개로 조직에 합류할 땐 정식 대부업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열흘 정도 일했을 무렵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두려 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총책이라는 사람이 ‘지금 관두면 네 신상 뿌려버린다’고 했어요.” 조직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강 실장은 채무자도 조직원으로 끌어들였다. 통제하기 쉬운 상대였기 때문이다. 훗날 조직 서열 2위에 오른 ‘서 이사’도 처음엔 채무자였다. 조직원 중 30%가량을 이렇게 채무자 중에서 영입했다.
신입 조직원은 합숙 교육을 받았다. 행동강령을 철저히 주입했다. 조직원끼리 이름 등 신상이나 사생활 묻지 않기, 업무 시엔 대포폰만 사용하기, 공용 와이파이 사용 금지…. 모든 보고와 지시는 대포폰과 텔레그램으로 이뤄졌다.
조직원이 주로 고향 선후배를 새 조직원으로 끌어들이면서 지역 기반이 생겼다. 콜팀은 광주, 상담팀은 서울과 부산, 수금팀은 충북 청주와 충남 천안, 전남 여수에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 모든 업무가 온라인과 전화, 문자로 이뤄졌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 범위는 전국이었다.
대출 수법도 같았다. 대부중개 플랫폼에 접속한 피해자를 노렸다. 철저히 소액만 빌려줬다. 적게는 10만 원, 많아도 150만 원을 넘지 않았다. 그래야 채무자가 이자가 비싸지 않다고 착각해 돈을 더 빌리기 때문이었다. 혹시 채무자가 돈을 빌리고 잠적해도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박성훈 자택을 압수수색하던 경찰은 집안 곳곳에서 현금 약 1억 원을 찾았다. 박성훈은 돈의 출처에 대해 “어머니한테 받은 것”이라며 범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강원경찰청 제공.
법정에서 만난 아내는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죄송하다”, “모든 게 제 잘못”이라며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조직원이 기억하는 모습은 달랐다. “악랄했죠. 총무팀 직원 중 아 주임만 전화로 ‘일 이따위로 할 거냐’고 막말을 자주 했거든요. 검거된 이후에야 걔가 총책 와이프라는 걸 알았죠.”
악랄한 추심의 흔적은 경찰이 압수한 대포폰에 문자메시지 등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 조직원은 인큐베이터에서 꼬물거리는 채무자의 갓난아기 사진을 보내며 ‘돈 안 갚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
강 실장 조직이 피해자에게 보낸 협박 문자. 갓 태어난 아이 병원비 등을 마련하려고 돈을 빌린 피해자는 ‘아이가 태어난 게 사실이면 추심을 미뤄주겠다’는 조직원의 꾐에 넘어가 아이 사진을 보냈다. 그것도 덫이었다는 건 협박 메시지를 받고서야 알았다. 강원경찰청 제공
단, 채무자를 직접 찾아가거나 물리력을 쓰진 않았다. 직접 만나면 흔적이 남아 붙잡힐 위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강 실장 조직이 또 다른 피해자에게 보낸 협박 문자. 조직은 피해자에게서 ‘비상연락망’ 명목으로 받은 가족과 지인 연락처를 볼모로 돈을 뜯어냈다. 강원경찰청 제공
강 실장이 된 박성훈은 조직원을 믿지 않았다. 조직 2인자인 서 이사에게도 본명과 나이를 숨기고 대포폰으로만 연락했다.
한 조직원이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 그는 “강 실장의 정체는 경찰에게 잡히고야 알았다”고 했다.
조직원의 배신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무렵 충북 진천에 있는 수금팀이 잠적했다. 강 실장 몰래 채무자 연락처를 빼돌려 따로 불법사채 조직을 꾸린 것. 강 실장은 인출팀을 언제라도 내칠 수 있는 채무자 출신으로 채웠다. 하지만 이들은 강 실장 조직처럼 치밀하지 못했다. 지인에게 현금 인출을 맡겼다가 흔적을 남겨 2022년 11월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이 피해자 가족의 신고로 수사에 착수한 지 2개월 만이었다.
그렇게 강 실장 조직의 존재가 드러났고, 경찰 수사는 윗선을 향했다.
박성훈은 지난해 3월 검거됐다. 서울 서초구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전날 필리핀으로 도주하려다가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진 사실을 알고 변호사를 급히 찾았다고 한다.
‘강 실장’ 박성훈(오른쪽)은 지난해 3월 서울 서초구 대로변에서 검거됐다.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그는 체포 당시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았았지만 범행은 부인했다. 강원경찰청 제공
그는 검거 후에도 빠져나갈 궁리를 멈추지 않았다. ‘석 부장’을 강 실장으로 몰아갔다. 석 부장은 고교 시절 박성훈을 폭행한 고향 선배였다. 그런데도 강 실장은 그를 핵심 측근으로 부렸다. 돈 앞에선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었다.
올해 2월 14일 박성훈은 1심에서 징역 8년과 벌금 5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범죄단체조직과 대부업법 위반 말고도 범죄수익은닉, 범인도피교사 등까지 총 7개였다.
박성훈은 항소했다. 변호인은 “죄는 인정하지만 징역 8년은 너무 과하다”며 “가족 재산을 처분해 합의금을 마련했다”고 했다. 박성훈은 1심 선고를 앞두고 피해자 29명에게 10억 원의 합의금을 줬다. 항소심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나머지 피해자와 모두 합의할 계획이라고 한다.
강 실장의 수익은 그중 최소 300억 원으로 추정됐다. 그는 월세 1800만 원짜리 서울 성동구 초고급 아파트인 트리마제에 살았다. 람보르기니, 벤틀리, 포르셰, 벤츠, BMW 등 초고가 외제차 7대를 몰았다.
강 실장은 불법사채 수익으로 람보르기니와 벤틀리, 포르셰 등 초고가 외제차 7대를 굴리며 호화 생활을 했다. 강원경찰청 제공
불법사채는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고 숨는 경우가 많아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 힘든 대표적인 암수(暗數) 범죄다. 금융감독원 미공개 조사에서 2022년 피해자가 82만 명으로 추정됐지만 그해 접수된 피해 신고는 1만350건이었다.
강 실장의 경우 대출 원금과 법정 최대 이자(연 20%)를 제외한 약 15억 원만 범죄 수익으로 판단됐다. 현행법에 법정 상한을 초과한 이자는 추징 대상이지만, 원금과 법정 이자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게 불법사채여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박성훈의 추징금은 고작 6억6635만 원이었다. 수익 배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다른 공범과 똑같이 나눴다. 결국 강 실장은 대포통장에 기록된 불법 대출액의 1%도 내놓지 않게 된 것이다.
공범조차 ‘말도 안 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성훈보다 먼저 재판받은 한 조직원은 억울하다고까지 했다. “제가 죄가 없다는 건 아닌데요. 저랑 박성훈은 재판부가 달랐거든요. 저는 검사가 구형한 그대로 추징금이 나왔는데, 박성훈은 절반 가까이 깎였더라고요.”
국세청은 지난해 11월부터 박성훈 일가에 대한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수사팀 이정만 경감은 “금을 사 모았다는 진술과 정황을 찾았지만, 끝내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박성훈 변호인 측은 이런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다. 그 정도 자산이 있다면 합의금을 마련하려고 가족 자산을 처분하겠냐”고 되물었다.
이 같은 입장을 전하자 한 조직원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조직이 가장 컸을 때 하루 수익이 1억4000만 원 정도였습니다. 조직 규모가 줄었을 때도 하루 8000만 원은 벌었습니다. 박성훈이 적어도 150억 원 이상은 챙겼을 겁니다. 금으로 월급을 준 적도 있어요.”
불법사채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김민우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돈의 덫(상): 덫에 걸린 남자’
(https://original.donga.com/2024/money1)
‘돈의 덫(하): 덫을 놓는 남자’
(https://original.donga.com/2024/money2)
실제 김민우의 인터뷰를 담은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GKw-RO8lUHo)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취재: 김소영 김태언 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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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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