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피고 제이엑스금속, 당시 일본광업과 같다고 보기 어려워" 강제연행·노역 등 불법행위 입증 부족…"납득 어려워, 항소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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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탄광에 강제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피해자 유족들이 당시 전범 기업의 뒤를 잇는 현존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피고 기업의 설립연도에 비춰 1945년 전후 존재했던 기업과 같다고 보기 어렵고, 강제동원 피해 사실 증명 역시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광주지법 민사 8단독 김정철 부장판사는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A·B씨 2명의 유족들이 제이엑스금속 주식회사(일본광업㈜의 후신)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고 26일 밝혔다.
A씨는 “심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고 이틀에서 사흘 굶는 일도 잦았다. 변변한 숙소도 없어 임시로 마련된 굴 안에서 힘들게 지냈다. 낙반 사고가 잦아 매일 ‘오늘은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생전 진술했다. A씨는 광복 이후 귀국했지만 후유증으로 진폐증을 앓다가 1980년 사망했다.
B씨의 유족은 B씨가 1942년 8월께 고향인 전남 장성군 일대에서 들일을 하던 중 강제 연행됐고 이듬해 6월까지 일본 이바라키현(자성현) 소재 히타치 광산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B씨는 광산 옆 허름한 숙소 건물 앞에 초소가 있었고 밤에는 출입구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고 채웠다고 구체적인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B씨는 매일 탄광에서 채취한 광물을 등에 지고 몇 시간씩 운반을 하면서 폐·허리 등 건강이 나빠졌고, 잦은 구타로 허리를 크게 다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도 항상 지팡이를 사용했고 대부분 앉아서 생활했으며 후유증에 시달려 1992년 숨졌다고 유족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이들 유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이엑스 금속 측이 제출한 이력사항 전부증명서(등기사항 전부 증명서)를 토대로 이같이 봤다.
재판장은 또 “A씨와 B씨가 ‘조선인 노동자에 관한 조사 결과’ 등 명부에 등장한 성명으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인정할 객관적 자료가 없다. A씨의 경우 생년월일이 명부상 창씨개명한 이름(C씨)과 일치하지 않는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연명 확인서’ 작성자들도 A씨의 구체적인 동원 행적 등을 잘 모른다고 하고, 명부에는 C씨에 대해 ‘미불금 없음, 퇴소 시 대우 900엔’ 이라고 적혀 있다”며 불법행위 입증이 부족하다고 봤다.
B씨에 대해서도 “유족들이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신고’를 할 당시 신고서에는 ‘B씨가 일본 나가현 소재 탄광에서 강제노역하다 해방과 같이 귀국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명부 상에는 일본 ’자성현‘ 소재 광산에서 근무하다가 1943년 6월 스스로 한반도로 돌아온 것으로 적혀 있고 명부에는 징용 여부 표시가 돼 있지 않는 점으로 미뤄 강제 연행·노역 등 불법 행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전날 열린 선고재판 직후 원고 측 법률대리인과 피해자 지원단체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내놨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대표는 “일제강점기는 국권마저 상실했던 시기로 피해 당사자들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을 뿐, 강제노역 당시 받았던 인격적 피해, 미지급 급여 등에 대한 확인서를 받아올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아니어서 입증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 강제동원 피해가 인정된 당사자가 패소한 사례는 이례적이다. 항소를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광주=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