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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본질 파고드는 간담 서늘한 추리물[정보라의 이 책 환상적이야]

입력 | 2024-06-29 01:40:00

중세 배경에 근대적 수사 기법
경쾌한 추리, 묵직한 여운 남겨
◇선녀를 위한 변론/송시우 지음/288쪽·1만5800원·래빗홀





정보라 소설가

첫 단편 ‘인어의 소송’과 표제작 ‘선녀를 위한 변론’은 제목에서 ‘추리’할 수 있듯이 각각 ‘인어공주’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살인사건 미스터리다. ‘인어의 소송’에서는 주인공 인어가 사랑에 빠졌던 왕자가 살해당하고, 인어가 졸지에 살인범으로 몰린다. ‘선녀를…’에서도 나무꾼이 살해당해 아내인 선녀가 범인으로 몰린다. 작가는 동화나 민담의 배경이 되는 중세적 현실에 “별안간 근대적인 사법체계가 들어선 동시에 과학수사 기법까지 발달”했다고 전제하고 이 가상의 살인 사건들을 풀어 나간다.

작가의 문체는 시종일관 경쾌하다. ‘오비 왕국’ 출신 ‘카스 공주’라든가, 검사 이수일과 변호사 심순애 등 인물들의 이름부터 웃음을 자아낸다. 작품의 후반에서 ‘라거 검사’와 탐정인 ‘몰트 백작’은 등장인물들의 동선과 시간 관계, 범행 동기를 파악해 진범을 잡아낸다. 박진감이 넘치는 정통 추리소설의 진가를 보여준다.

여기서 잠시 박진감 없는 이론 얘기를 하자면 추리소설에는 사건(피해), 피해자, 단서, 탐정, 추론 등 필수 요소들이 있지만 핵심은 역시 수수께끼다. 반드시 살인 사건 같은 범죄 피해가 일어나야만 추리소설이 성립하는 건 아니다. 어떤 의문이 발생하고, 등장인물(들)이 사건에 관련된 구체적인 단서와 증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추리소설이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임기숙 과장이 등장하는 ‘누구의 편도 아닌 타미’와 ‘모서리의 메리’가 바로 이런 살인 사건 없는 일상 추리물이다. ‘누구의…’에서 임기숙 과장은 무단결근한 여성 사원이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해서는 경리부 소속인 자신에게 대뜸 “총무부죠?”라고 외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임기숙 과장이 발견한 모종의 고지서가 추리의 결정적 단서 역할을 한다. ‘모서리의 메리’에서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강아지용 과자가 어째서 조각조각 부스러져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추리의 출발점이 된다. ‘누구의…’에서는 범죄가 일어났고, ‘모서리의 메리’에서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해결된다. 그러나 의문, 단서와 증거, 합리적 추론과 해답으로 이어지는 추리의 구조는 동일하다.

‘알렉산드리아의 겨울’은 실제로 있었던 범죄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실제 사건을 소설화하기란 언제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아동이 피해를 입은 사건인 만큼 작품의 문체는 앞의 네 단편과 달리 어둡고 차분하다. 이미 범죄는 일어났고 범인은 검거됐으며 사건의 배경과 동기를 파헤치는 과정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다. 작가는 여기서 악의 모습들을 탐구하지만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 세상에 악은 언제나 존재하며 그러므로 더 지독한 형태의 악이 또 나타날 것이라는 결말의 예측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여름밤의 가벼운 추리물부터 악의 본성과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까지 갖춘, 모든 추리소설 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작품집이다.



정보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