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모양도 맛도 바나나와 비슷한 한국산 열매가 있다. 으름 열매가 그 주인공. 조선의 폭군 연산군은 가을에 열리는 이 한국산 바나나의 맛에 중독됐다. 연산군 5년에는 직접 “포도와 목통(木通·으름덩굴)의 열매 등을 매해 채취해 대궐로 들이라”라고 전교를 내렸고, 재위 6년에는 승정원 승지들에게 으름 열매를 맛보게 한 후 시를 지어 바치도록 하기도 했다.
반정으로 임금 자리에 오른 인조의 창만증(脹滿症)과 구창증(口瘡症) 치료에 항상 들어갔던 약재 또한 으름덩굴의 줄기를 말린 목통이었다. 옛 의서들은 창만증에 대해 “배만 부을 뿐 사지나 얼굴은 마르거나 붓지 않고, 부푼 배는 겉만 딴딴하고 속은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마치 북과 같다”고 표현한다. 인조의 어의들은 이를 신경병 증상의 일종인 간열(肝熱)로 진단하고 목통을 넣은 청간탕(淸肝湯)이나 시호사물탕 등을 처방했다.
당시 도승지였던 김육은 인조가 앓은 지병들의 원인에 대해 “성상께서는 불행한 운세를 만나 노심초사로 병이 생기고 뜻이 풀리지 않으며 홀로 궁중에 깊이 계시므로 기운이 막히고 혈맥이 정체돼 돌지 않습니다”라고 지적했다.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집권에 성공한 그는 또 다른 반정이 일어날까 항상 걱정한 데다 이괄의 난 등 내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창만증이나 입안이 헐어 염증이 생기는 구창증 모두 이런 신경병적인 이유로 간열이 차여 생긴 질병임을 감안하면 신하들의 분석은 거의 정확해 보인다.
한방의 고전 ‘본경소증’엔 으름덩굴의 줄기, 즉 목통의 약효가 “청각을 밝게 해주고 건망증을 없앤다”고 나오는데, 특히 귀와 관련해선 ‘혈관성 이명’에 효과가 크다. ‘욱’ 하는 소리가 들리거나 심장 뛰는 소리, 즉 심장 박동수와 일치하는 소리가 들리는 박동성 이명 치료에 목통의 심장 소통력과 이뇨작용이 큰 효험을 발휘한다.
우리 조상들은 청력이 좋은 사람들을 “귀가 밝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전등이 환하게 빛나듯 우리 몸의 양적(陽的) 기운이 귀의 기능을 한껏 끌어올린다는 의미다. 심장은 양기(陽氣)의 근원이므로 심장의 소통력을 높이는 목통은 청력을 강화하는 효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즘 이어폰 사용이 크게 늘면서 소리 자극으로 인한 이명이나 소음성 난청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이명이나 난청의 원인도 외부 소리에 반응하기 위해 귓속 동맥의 혈류가 늘어나면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으름덩굴의 줄기, 즉 목통의 한방적 치료 효과에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