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오늘과 내일/김호경]누구나 불법사채업자가 될 수 있는 나라

입력 | 2024-07-02 23:12:00

김호경 8기 히어로콘텐츠 팀장



올해 2월부터 불법사채 조직을 추적하면서 전현직 불법사채 조직원 여럿을 만났다.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스물셋 여성이었다. 작고 마른 체구에 서투른 화장법까지 더해져 외모는 고등학생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는 2년간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강 실장’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 경찰이 추산한 강 실장 조직의 불법대출 규모는 1000억 원대. ‘천 부장’으로 불린 그는 자금 관리를 맡았다. 재판 내내 고개를 들지 않던 그는 판사가 직업을 묻자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회사원과 대학생까지 사채 조직원이었다


취재 초기엔 서민의 고혈을 빨아내는 불법사채 배후에 당연히 폭력조직이나 검은돈을 대는 전주(錢主)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취재팀이 마주한 불법사채 조직의 ‘민낯’은 천 부장처럼 평범해 보이는 20, 30대들이었다. 이삿짐센터 직원, 식당 종업원, 화장품 도매업자, 휴대전화 판매업자, 회사원, 대학생까지. 판결문으로 확인한 대다수 조직원들은 흔히 떠올리는 범죄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처음엔 지극히 평범한 이들이 불법사채에 발을 들인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전현직 조직원을 하나둘 인터뷰하고 나니 그제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불법사채로 돈을 벌기가 너무 쉽다”고 설명했다.

먼저 목돈이 없어도 된다고 했다. 30만 원을 빌려주면 일주일 뒤 50만 원을 갚는 게 불법사채의 ‘공식’으로 통한다. 이자도 말이 안 되지만 상환 시간이 1분만 지나도 연체료가 붙는 게 더 큰 문제다. 연체료는 사실 ‘부르는 게 값’이라서다. “300만 원만 있어도 할 수 있다”는 전직 조직원의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했다. 가입 절차가 까다로워져 요즘 보이스피싱 조직들도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구하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불법사채 조직은 채무자들에게 빚을 깎아주는 조건으로 휴대전화와 통장을 넘겨받으면 그만이었다. 빚 탕감을 미끼로 조직원을 불리는 사례도 흔했다. 불법사채의 세계에서는 채무자에게 돈을 뜯어내면서 범행 도구와 인력까지 조달하는 완벽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셈이다.

과거처럼 거리에서 명함이나 전단을 돌릴 필요도 없다. 대부업 등록증을 구해 온라인 대부중개 플랫폼에 광고를 올리면 돈이 급한 사람들이 먼저 연락해 오기 때문이다. 등록증은 ‘통장 잔액 1000만 원’을 인증하고, 18시간짜리 강의를 들은 뒤 서류상 사무실만 갖추면 발급받을 수 있었다. 바지사장 명의의 등록증도 허다했다. 정식 대부업체인 척하며 피해자를 속여 불법사채로 끌어들이는 ‘플랫폼 사채’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결국 불법사채를 하는 데 두둑한 밑천이나 기술, 인맥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2년간 불법사채 업계에 몸담았던 한 남성은 “1, 2개월만 배우면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전 검거된 20대 불법사채 업자는 직원 없이 홀로 3년간 40억 원을 굴렸다고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부터 뿌리 뽑아야


총책인 강 실장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대출 계약을 맺는 상담팀과 추심을 담당하는 수금팀 간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돈을 빌려주고 뜯어내는 두 가지 노하우만 익히면 누구라도 독립해 다른 조직을 차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다.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 그리고 여당은 지난달 30일 플랫폼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하고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나 등록증을 만들지 못하도록 자본금 요건과 같은 ‘진입 장벽’을 높이는 데는 신중한 분위기다.

한 불법사채 조직원은 “방법만 알면 진짜 별거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했다. 불법사채를 뿌리 뽑으려면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김호경 8기 히어로콘텐츠 팀장 kimh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