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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칼럼]‘대왕고래’를 보는 두 남자의 다른 시선

입력 | 2024-07-02 23:21:00

유전개발 성공은 국가적 난제 풀 호재
윤 대통령에겐 연금개혁·감세의 해법
이 대표에게는 기본소득 재원문제 해결
한국 정치 풍토선 축복 아닌 저주 될 수도



박중현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동해 심해 석유가스전’의 탐사시추 계획을 승인했다고 처음 알린 게 지난달 3일이다. 탐사 자원량이 최대 140억 배럴로 21세기 최대의 석유개발 사업인 남미 가이아나 광구보다 크다는 해설도 덧붙였다. 이렇게 ‘산유국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뉴스가 한 달도 안 된 지금 국민의 관심권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다. ‘불확실성이 큰 사안인 만큼 냉정해지자’는 신중론이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제대로 먹힌 적이 있었나 싶다.

메신저의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산업통상자원부 자원개발 담당 국·실장이나, 한국석유공사 사장같은 실무자나 전문가가 발표하는 게 제격이었다. 그랬다면 자연스럽게 후속 뉴스가 이어지면서 국민의 기대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지율 20%대의 대통령이 마이크를 직접 잡고 이 소식을 전하는 바람에 이 사안은 정치이슈로 변질됐고 메시지는 훼손됐다.

대통령 입을 통해 대왕고래 석유가스전을 발표하는 결정은 대통령 스스로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광구 분석을 맡은 액트지오사에 대한 잇따른 의혹 제기, 대통령이 발표자로 적절한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는데도 용산 대통령실, 정부 안에서 누구도 판단 미스로 질책 받지 않았고,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말도 안 나오는 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윤 대통령이 거듭 강조한 모토 아닌가.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천연가스·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굿 뉴스마저 정치 논쟁으로 폄하되는 현실이 대통령으로선 답답할 수 있다. 정부가 밝힌 최대 추정 매장량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자그마치 1조4000억 달러, 한화 약 1900조 원이다. 부화하지도 않은 달걀을 놓고 병아리 수를 세는 식의 셈법이긴 해도 한국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다. 절반 정도인 1000조 원만 돼도 당장 1100조 원을 넘긴 국가채무 대부분을 갚을 수 있다.

1000조 원은 현재 국민연금 기금 총액과도 맞먹는 금액이다. 연금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성세대를 위한 구연금, 미래세대를 위한 신연금으로 계정을 나누자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제안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600조 원이다. 말로만 연금개혁을 추진한다고 비판 받는 대통령에게 대왕고래는 개혁을 미뤄온 좋은 변명거리가 될 수 있다. ‘중산층 세금’이 돼버렸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상속세, 종합부동산세를 과감히 깎아주거나, ‘자녀 출생 1인당 1억 원’ 같이 파격적인 저출생 해법을 추진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

전혀 다른 의미에서 대왕고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 그의 고정 레퍼토리인 ‘기본소득’의 최대 약점인 재원조달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줄 수 있어서다. 지난 대선 때 이 전 대표가 내놨던 기본소득 공약대로 국민 1인당 연간 100만 원, 청년에겐 200만 원씩 나눠주는 데 필요한 금액은 한 해 60조 원이다. 1000조 원이면 이런 기본소득을 17년 동안 나눠줄 수 있다.

선례도 있다. 미국 알래스카주는 석유 등 천연자원 수입 일부를 활용한 영구기금을 만들어 1년 이상 거주 주민에게 많게는 한 해 200만 원 넘는 돈을 나눠준다. 이 전 대표식 기본소득에 가까운 모델이다. 게다가 이 전 대표는 고유가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익이 늘었던 정유회사, 기준금리 상승으로 돈을 번 은행에 횡재세를 물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대왕고래에서 가스, 석유가 쏟아진다면 그야말로 ‘국가적 횡재’다.

문제는 대왕고래 심해유전의 성공 가능성이 긁지 않은 복권과 같다는 점이다.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은 20% 확률을 뛰어넘어 가스·석유가 대량으로 발견된다 해도 실제 상업 생산이 이뤄지는 건 10여 년 뒤인 2035년 이후다. 윤 대통령은 물론이고, 이 전 대표도 정치권에서 은퇴했을 시점이다. 나랏빚을 늘려서라도 국민 손에 돈을 쥐여주자고 주장해 온 이 전 대표가 “십중팔구 실패할 사안”이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인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1969년 노르웨이 앞바다에서 북해 유전이 발견됐을 때 그 나라 정당들은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벌였다. 결론은 원유, 가스 판매에서 나오는 이익 대부분을 펀드에 넣어 재투자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세운 펀드 운용의 원칙은 ‘현 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되,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침해하지 않는다’였다. 그렇게 노르웨이는 ‘자원의 저주’를 현명하게 피한 나라가 됐다. 자녀·손주 세대를 위한 연금보험률 인상 같이 지극히 당연한 사안도 합의가 안 되는 한국에선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다. 눈앞의 표만 좇는 포퓰리즘, 진영이익 챙기기에 푹 빠진 지금 한국 정치판을 본다면 고개를 내밀려고 하던 대왕고래가 바닷속으로 다시 숨어버릴 것 같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