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우 정치부 차장
“원래 있던 (북-러) 조약을 이번에 건드리긴 할 거다.”
지난달 중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방문 며칠 전,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귀띔했다. 이후 정상회담 당일, 푸틴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 말처럼 새 조약을 체결했다.
다만 당시 평양발 속보로 전달된 조약 내용의 수위는 분명 예상을 훌쩍 넘어선 수준이었다. 김정은은 양국 관계를 3차례나 “동맹”이라고 표현했다. 푸틴은 “군사 기술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 외교장관은 아예 조약 중 4조를 콕 집어 “협정 당사자 중 한쪽이 침략당하면 상호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며 내용까지 일부 공개했다.
다음날 오전, 이런 우리 정부의 시큰둥한 반응을 조간 제목으로 봤는지 북한은 보란 듯 조약 전문을 통째로 공개했다. 그렇게 확인된 전문 중 4조에는 어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으면 “타방이 지체 없이 보유한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분명히 명시됐다. 북-러 연합훈련의 길을 뚫어준 것으로 해석된 3조, 러시아의 대북 첨단 군사기술 이전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 8조 등도 우리에겐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다가왔다.
기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넋 놓고 있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건 아닌 듯하다. 회담 수일 전 이미 조약 내용을 구체적인 수준으로 확인은 했단 얘기다. 그럼 왜 정상회담 당일엔 조약의 의미를 후려치는 발언을 했을까. 이에 대해 다른 고위 관계자는 “러시아가 다양한 허들을 두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군사 개입 결정 시 러시아 국내법과 유엔 헌장을 따라야 한다는 등 나름의 안전장치들을 조약에 끼워 둔 만큼 ‘자동군사개입’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설사 그렇다 해도 정부가 조약의 의미를 잘못 해석해 그릇된 판단을 내렸고 부적절한 초기 대응까지 이어졌단 비판에서 자유롭긴 어렵다. 당장 전문 곳곳에 잔뜩 도사린 ‘지체 없이’ ‘모든 수단’ ‘군사적 원조’ 등 노골적인 표현들은 이 조약이 한반도를 넘어 국제안보를 위협할 만한 수위임을 확인해준다. 이를 자랑하듯 북-러는 이 조약의 효력까지 ‘무기한’이라고 못 박았다.
정부는 북한이 전문을 공개한 날 오후에야 서둘러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소집한 뒤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전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라고 하더니 하루 뒤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며 초강경 대응 카드를 내놓은 셈이다.
신진우 정치부 차장 nice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