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과 美 현대미술의 탄생 미술가에 벽화-미술교육 일자리 제공… 1933∼1943년 회화 20만 점 쏟아져 美 추상표현주의 미술 태동의 밑바탕 부친 장례식 갈 차비도 없었던 폴록… 벽화사업 고용되며 생계 안정적 유지
1951년 1월 미국 ‘라이프’ 잡지에 실렸던 미술 작가들의 모습.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 상당수가 뉴딜 정책의 수혜자였다. 예술 뉴딜 정책은 1933년부터 1943년까지 공공 벽화, 미술 교육 등에 1만 명 이상의 미술 작가를 고용해 생계 안정을 지원했다. 사진 출처 라이프
이들은 1930년대부터 상당 기간 정부에 고용되어 월급을 받아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불황기를 버텨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국 예술 뉴딜 정책의 일환인 ‘연방 미술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포스터.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와 이젤을 합성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먼저 예술 지원 정책의 배경엔 뉴딜의 설계자인 해리 홉킨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가는 마땅히 직업군으로 묶기 모호한 점이 있었고, 고용 방식도 불투명해 지원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홉킨스가 외친 “예술가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이 루스벨트의 마음을 움직여 미술 지원 프로젝트가 본격화될 수 있었다고 한다.
빅터 아르나우토프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코이트 타워에 그린 공공 벽화. 강도 사건, 교통 사고 등 도시 생활이 담겨 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 사업에는 향후 화려하게 날아오를 미래의 스타들도 대거 포함되었다. 대표적으로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아실 고키를 손꼽을 수 있다. 잭슨 폴록은 거의 8년간 지원을 받으며 대공황 시기를 버텼으니, 미국 정부가 키워낸 작가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20대의 젊은 폴록은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을 갈 차비가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청소부로 일하고 있던 그는 연방 미술 프로젝트의 벽화 사업에 고용되면서부터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미 정부는 미술뿐만이 아니라 영화, 문학, 음악 등 예술 분야 지원에 1935년에만 2700만 달러라는 당시로도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이 덕분에 위축되어 가던 미국의 문화예술계는 점차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나아가, (당시 신흥강국이었던 미국은) 이후 세계 문화예술계를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관리의 문제였다. 미 정부는 1943년 미술 뉴딜 정책을 종료하면서 작가들에게서 받은 20만 점의 작품의 상당수를 헐값에 매각했다. 무게로 달아 팔았다고 하는데, 한 전기배관공은 캔버스를 절연제로 쓰려고 샀으나 온도가 높아지면 물감이 녹고 냄새가 나서 불평했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횡재를 얻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뉴욕 퀸스에서 액자 가게를 하던 허버트 베네비라는 사람은 이때 3달러에 여러 점의 유화 작품을 구매했는데, 이 중에는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의 작품도 있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가장 큰 횡재를 얻은 쪽은 미국 문화예술계 전체일 것이다. 미술 뉴딜 정책 덕분에 미국 미술이 세계의 주도권을 쥐게 될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미술 뉴딜 정책은 현재까지도 정부 예술 정책에 있어 전설처럼 기억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