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한지로 둘러싸인 방 빛을 솜처럼 머금는 마법 일어나 한옥의 나무-흙-기와 재료도 시간이 갈수록 깊은 맛 뿜어내… 새로운 가치-미의식 발굴해야
전통 한지로 문과 벽을 마감한 방. 빛을 솜처럼 머금고 은은하게 뿜어낸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어느 분야든 전통과 역사는 미래의 바탕이 된다. 한옥 역시 다양한 지금의 건축들이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는 비옥한 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미래와 연결되지 않는 전통과 역사는 경직되어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기 때문에 전통과 역사는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과 미래를 향한 에너지다. 한옥은 오랜 시간 우리 민족의 생활방식, 구법, 미의식 등이 담긴 보물창고로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미래의 미의식과 산업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하나의 한옥이 지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재료와 구법이 필요하다. 또한 각각의 재료에는 원자재의 생산, 재료의 제작, 재료의 시공 등 거대한 문화가 잠재하고 있다. 한 예로 방을 도배하기 위한 한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알맞은 두께에 껍질이 잘 벗겨지는 닥나무를 채취하고 삶고, 두드리고, 찧고, 물에 풀어 섬유질을 만든다. 그다음 황촉규라는 닥풀을 찧어서 물에 넣고 밟아 끈적한 닥풀물을 만들어서 섬유질 물과 함께 섞는다. 이후 대나무발로 떠서 물기를 빼고 말리는 과정을 통해 한지를 만들게 된다. 우리나라의 한지 제작 시기는 3∼4세기경으로 추정되기에, 한지에 담긴 문화의 깊이는 1600년 이상이 된다. 여러 결의 섬유질로 만들어진 한지는 내구성이 뛰어나 바티칸의 기록유산에도 사용되고 있다.
한지 도배를 하는 방법을 좀 더 알고 싶어서 솜씨 좋은 한지 도배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지 도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었는데 우선 흰 종이로 초배를 한 후 흰색 부직포를 붙이고 삼합지라는 두꺼운 한지로 한지의 네 모서리만 풀로 칠해 벽에 띄워서 붙이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초배와 정배 두 번 하는 방식과 달라서 시공 이유를 물어보니 예전에는 한지에 깊이감을 더하기 위해 칠 겹 도배라는 방식도 있었다고 말했다. 덧칠로 유화의 깊이를 더하는 것과 같이 흰색에 흰색을 더해 깊이를 만드는 방식인 것이다. 이 대화는 지금도 마음 깊이 남아 건축을 하는 데 나침반이 되고 있다. 건축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을 꼽는다면 그중 하나는 이때 도배한 작은 방이다. 정성껏 도배를 마친 가로세로 2.1m 남짓한 방에 들어가서 미닫이 한지문을 닫고 방에 앉은 순간 갑자기 마법이 일어났다. 오전 동쪽 빛을 받은 한지문의 창살은 추상화처럼 그림자만 보이고, 나머지 한지문은 방을 감싼 한지와 일체화되어 문이 사라져 버렸다. 사방이 한지로 둘러싸인 방은 빛을 솜처럼 머금고 동시에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었고, 빛은 온기가 되어 온몸으로 전해졌다. 빛으로 가득 찬 방은 찰나의 순간 중력이 사라져 부유하는 것 같은 공간감이 들었다. 이후 나도 모르게 순간 눈이 감기고 숨을 고르게 되니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온전히 촉감만 방 안에 가득했다.
전통적인 흙벽을 현대적 미감으로 재해석한 한옥 흙담. 한옥에 쓰이는 건축 재료들은 시간이 갈수록 깊은 맛을 낸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과거는 끊임없는 ‘지금’의 축적이며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의 바로 앞이다. 즉 과거, 현재, 미래는 ‘지금’이라는 연속선상에 있다. 또한 어떤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은 지금의 나와 앞으로의 나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미래는 과거의 연속이기도 하다. 한옥이 과거의 모습과 외형에만 국한되어 논의된다면 한옥은 고립되고 자생적인 미래의 생명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미래의 한옥은 집을 짓는 범위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가치와 미의식을 다양한 산업에서 발굴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전통에 담긴 미래의 유산을 발굴하는 일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